30. 나! 이혼했어.
초여름의 밤거리를 혼자 걸어보는 것도 꽤 낭만적이다. 배가 고파오는지 꼬로록 소리가 난다. 그러고 보니 아직 커피 한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녀는 뭘 좀 먹을까 생각하며 간판을 이리저리 살피다 눈에 익은 간판이 보였다. 명수랑 두 번쯤 왔었던 노래주점인데 잊고 있어서 몰랐는데 최근에 어디서도 본 듯한 이름이다.
몇 집 건너 김밥 집으로 들어가 냄비우동과 김밥 한 줄을 시켰다. 낮에 샌드위치를 먹어서 그런지 배가 많이 고팠었나보다. 순식간에 다 먹어치우고 지갑을 꺼내려다말고 조그만 메모지를 보고는 깜짝 놀랬다.
"아! 이거네!"
"네? 뭐가 요?"
"아 아니 예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놀란 종업원이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선미는 얼른 계산을 하고 길거리로 나와 아까 그 노래주점 간판을 찾았다. 틀림없이 메모지에 적힌 전화번호랑 간판 이름이 같았다. 바로 현숙 이가 한다던 술집이 아닌가.
이 술집은 다른 곳과는 달리 노래방처럼 모두가 룸으로 되어있고 문 위에 조그맣게 룸 고유 이름이 적혀 있고 룸 안에는 스텐드 바 식으로 의자가 나란히 주욱 놓여 있고 노래방 시설도 다 되어 있어서 술도 마시고 노래도 마음대로 부를 수 있게 되어 있는 곳이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을 까...
그 앞에서 선미는 잠시 망설였다. 특별히 다른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무슨 일로 이런 장사를 하게 되었는지 궁금증이나 풀고 갈까 하는 생각에 계단을 밟았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폭이 너무 좁은 편이라고 전에도 느꼈는데 또 다시 같은 느낌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자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몇 분인가요?"
"아니...저...혼자인데요"
금새 여자는 미소를 거두었다.
"난 사람을 좀 만나러 왔는데요."
"어떤 손님인데요?"
"아..손님이 아니고...친구인데 여기서 장사를 시작했다던데.....현숙이라고..."
"현숙이? 현숙이 라면....아하 우리 큰 사장님! 잠깐만 기다리세요. 안에서
불러올게요."
"큰 사장님이라니요?"
"코너 사장이 아니고 이 홀 전체 사장님을 우리는 큰 사장님이라고 해요."
"아 네 그래요?"
.....역시 통은 커 가지고 처음부터 크게 놀고 있네. 아직 매운 맛을 모르겠군.....
전처럼 문 위에 이름들은 나라 이름들 그대로 이다. 런던, 홍콩, 중국, 미국, 영국, 베트남 등등...
"어머...얘! 주 선미! 이게 얼마 만이니? 왜 인제 오는 거야. 다른 애 들은 벌써 한번씩 다 왔다 갔는데..."
"그랬니? 좀 바빴어."
현숙이는 선미를 홀 안쪽에 있는 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인터폰을 누르더니 누구를 부르는 것 같았다.
"맥주 할래. 양주로 할까?"
"양주는 무슨....?"
하얀 드레스 셔츠에 빨간 나비 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들어 와서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절을 꾸벅하고 서 있다.
"여기 맥주 한 병하고 양주 좋은 걸로 가져오고 안주는 박 마담한테 얘기해서 가져와!"
웨이터는 다시 꾸벅 절을 하고 나간다.
"그런데 현숙이 너 웬 일로 이런 장사를 시작했니? 두렵지 않아?"
"글세 처음엔 두려웠었는데 몇 달하고 나니...이젠 재미있어지네."
"다행이다. 내 친구도 카페 하다가 그만 뒀는데 술장사 되게 힘들다던데. 넌 취향에
맞나보다."
"듣기 좀 뭐 한데....그런가보지 뭐. 카페는 양반이야. 그래도 다 힘은 들지. 더구나 여긴 룸마다 다
자기 장사여서 사장이 있다보니 경쟁이 붙어서 가끔 손님들 유치로 싸움이 일어나는데 그때가 제일 골치 아파."
"네 남편 사업은 아직 잘 되니?"
그때 술과 안주가 들어와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 말이야....이혼했어"
"이혼? 아니 왜?"
현숙이는 커다란 유리잔에 맥주를 붓고 조그만 양주잔에 양주를 부어 맥주 잔에다 넣어서 선미에게 주었다. 이것이 바로 폭탄주라고 하든가. 자신도 똑 같이 만들어 술잔을 들었다.
"이거 독한 거 아냐?"
"처음에 이렇게 마시고 나서 서서히 술을 마시면 금방 안 취해."
"그래? 금방 취할 거 같은데...."
"마셔봐. 마시기 꽤 괜찮아. 원 샷이다."
....에라 모르겠다. 설마 친구를 죽이기야 하겠냐?....
시원하고 쏘는 듯한 맥주 맛과 독하고 싸한 양주 맛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이다. 선미는 처음 마셔보는 폭탄주라 조금 두려웠는데 맛이 괜찮은 거 같다.
"음...괜찮은데?"
"어때..좋지? 그 대신 자꾸 마시면 안 되고 여자들은 첫 잔만 이렇게 마시는 거야."
"벌써 술 도사가 다 된 것 같네?"
"나도 여기 마담들한테 배웠지."
"그건 그렇고 이혼이라니?"
"...후 우..."
현숙이는 한숨을 길게 내 쉬고는 입을 연다.
"애들 아빠가 보증 서 줬던 친구가 쫄 닥 망해서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하마터면 그이가 감옥에 갈 뻔했잖아. 그 동안 그이 모르게 뒷돈 좀 챙겨 놨으니 망정이지...회사도 넘어가고 다행히 집은 내 앞으로 등기가 되어 있어서 무사했는데 고향에 땅도 다른 부동산도 다 넘어갔어. 집 팔아서 전세 얻고 이 장사 시작했지. 다른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 주제로는 할게 없었어."
"망해도 너는 먹고살기는 걱정 없겠다. 그런데 왜 이혼을 하니?"
"무슨 소리야. 알고 보니 이 인간이 보증 서 준 게 그거 하나가 아니더라고...그대로 있다가는 집도 내
돈도 다 뺏길 거 같아서 처음엔 서류 상으로만 이혼하자고 했었는데 이 남자 나 몰래 패물 갖고 나가서는 성공해서 오겠다고 쪽지만 남기고 외국으로
날랐어."
"애들은?"
"집에 친정엄마가 와 계셔."
"선미 넌 아직도 싱글이니? 왜 결혼 안 해? 독신주의자야?"
"글쎄! 독신주의자는 아닌데 내 주위에 결혼해서 힘들어하는 친구들 보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네."
"나도 한 몫 하게 됐네. 사실 눈으로 보이는 행복이란 잠시 스쳐 가는 바람이야. 가슴으로 느끼는 행복이
진정 오래 남는 거지. 내 마음속에는 지난날의 행복했던 날들이 지금의 나를 위로 해주거든. 아..그래서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한다고
하는가?"
현숙이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오는 것이 보인다. 선미는 자신이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한다. 어느새 동그랗고 납작한 양주병이 절반이나 비어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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