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언연의 늪/◈ 감성 엣세이

흐르는 빗 물은 차가워도 행복이다.

보라비치 2008. 4. 16. 10:47

 

흐르는 빗 물은 차가워도 행복이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새벽에 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조금 열려진 창문으로 조금은 서늘한 밤바람이 스며들고

그 너머로 빗소리가 들렸다.

아...비다...

어둠이 부유스럼하게 밝아오는 창가에 숨어들고

새벽에 내리는 빗소리는 밤새 뒤척이느라

지친 머릿 속을 씻어주는 듯 맑아진다.

눈을 감았다...

사르르르.툭..툭....정겨운 낙수물 소리.....빗소리....

난 이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비를 좋아하는가봐..

 

이 좋은 비에 온 몸...온 마음을 맡기고 싶어 나갔다.

아...이런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하지? 그냥 나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할까...

어제 반쯤 벌어졌던 목단꽃이 빗방울을 한껏 취하고 있더라.

이 아름다움이여! 청초한 여인의 자태와 같음이다.

비에 옷이 다 젖어도 좋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차가워도 행복이다.

 

 

 

내리는 비가 아직은 차가운지 담벼락에 바짝 붙어

빙긋이 미소를 머금은 담쟁이 넝쿨

몇 년 전에 답사지에서 씨를 채취해서

주머니에 넣고 왔다가 무심코 던져 버렸었는데

어느날 조그만 싹이 올라 오더니 벽을 기어 올라 가더라...

그게 너였어...하하...

그 무더운 여름 날 뜨거운 시멘트 벽을 꿋꿋하게 잡고

버티는 네 모습에서 왜 내가 보였는지...

난 늘 너를 보면 살아 갈 힘이 생겨.....

넌 그대로 살으려무나...날 위해서..

내가 널 지켜 줄게........꼭 지켜 줄 거야...

 

 

 

그저께 쯤이였나...집 앞 골목을 걷다가 만난 민들레다.

돌을 시멘트로 이어 붙여진 옹벽 갈라진 틈새에서

자랑스럽게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끈질김...

그래..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종종거리며 작은 노랑얼굴들이 됐구나...

부모를 잘 만나야 호강한다는 말이 있더라...

넌 너의 씨종탓도 아닌 거야...그건 바람 탓이야...

왜 하필이면...나였나...그래..너와 난 어쩌면 비슷한 운명이구나...

바라지 않아도 누구에 의해서 벌어지는 운명의 장난들....

그건 오로지 운명이기에 누굴 탓하겠니........

그냥... 살아 지자꾸나...그냥...살다가..그냥...사라 지자꾸나..

 

-정언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