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자전적 소설/◈연재소설-2.가을빛 연가(종결)

가을빛 연가<22>가슴에 내리는 서리

보라비치 2005. 10. 31. 10:41

22. 가슴에 내리는 서리

 

벽에는 새 달력이 걸리고 TV에서는 며칠 내내 새해의 계획이라든지 설날음식상 차리기 등 야단들이지만 선미는 별 다르게 달라지거나 특별한 일도 없었다.

 

명수 역시 새해가 되었어도 여전히 낮에는 공장 일에 몰두하고 해가 지면 불나비처럼 번쩍이는 네온사인에 묻혀 빙빙 돌아간다. 구정에는 명수의 공장이 일주일 쉰단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명수는 이것저것 선물 꾸러미를 준비하며 고향에 갈 준비를 했다. 선미는 굴비 꾸러미를 준비하여 명수에게 줬다.


"뭘 사야 할지 몰라 굴비를 샀어요."


"신경 써줘서 고맙소. 그런데 며칠동안 당신 혼자 있겠구려. 미안하오. 내년에는 우리 같이 갈 수 있겠지?"


"잘 다녀오세요."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명절이면 선미는 혼자 눈물 깨나 흘렸지만 그것도 나이 탓인지 아니면 눈물이 말라 버렸는지 이젠 그냥 무 덤덤해졌다. 아니 그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꽃가게도 며칠 문을 닫기로 했다. 다들 고향에 가니 어쩌느니 야단들인데 문을 열어 놓기가 왠지 청승맞아 보이기 때문이다.

선미는 쉬는 동안 연주 카페에 나가 주방 일을 도왔다. 명절인데도 카페에는 손님이 제법 많았다.
"얘! 선미야. 너 혹시 이 장사하고 싶은 생각 없니?"


"응? 무슨 말이야?"


"아무래도 나 이거 때려 치워야겠어."


"왜?"


"술장사라는 거 장난이 아냐. 너무 힘들어. 그리고 남편도 그만 뒀으면 해."


"네 남편 아직도 동생 때문에 의심하니?"


"아니 그게 아니고. 농장 일이 좀 바빠지나 봐. 자꾸만 날더러 도와 달래."


"그래? 다행이다. 근데 난 물장사는 체질에 맞지 않아. 그냥 꽃 장사나 할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런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지."

 

선미는 쉬는 동안 명수 집에는 가지 않았다가 연휴가 끝나갈 무렵 청소를 하기 위해 명수 집으로 갔다. 사람이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도 먼지가 제법 쌓여있었다. 냉장고 청소도 하고 거실 바닥은 청소기로 밀고 걸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TV장식장 유리를 닦으려고 문을 열자 조그만 봉지가 있어 들여다보니 작은 상자와 엽서가 있어서 꺼내 보았다. 선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미씨!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살까 망설이다 그냥 조그만 부로찌를 샀소. 마음에 들었으면 하오. 다음엔 선물 사러 같이 갑시다.....

 

그녀는 조그만 상자를 열어 보았다. 가운데 하얀 진주 여러 개가 박힌 꽃 모양이 예뻤다. 이 남자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준비했으면서 왜 그녀에게 주지 않았는지...

 

조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금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한밤에 찾아온 여자 때문에 한동안 둘 사이가 서먹해 있었기에 선물을 주기엔 좀 어색했으리라. 어쩌면 그녀 스스로 이 선물을 발견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선미는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명수씨! 고마워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서운해했었는데...>

 

이틀 후 명수가 왔다. 차가 밀려 몇 시간동안 차를 운전해온 탓인지 피곤해 보였다.


"명수씨! 고마워요."


"뭐 뭐가?"


"선물요. 난 아무 것도 사지 않았는데....미안해요."


"아! 봤소? 마음에 드오? 그리고 당신도 선물 했잖소. 굴비..."

 

오랜만에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감돌았다.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명수는 이런저런 고향 얘기에 빠졌다. 선미는 아무 것도 할 얘기가 없어 그냥 듣기만 할 따름이었다.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다. 그녀의 이런 기분을 이 남자는 아는지 모르는지.

 

명절의 들떴던 기분을 뒤로하고 다시 생활의 전선으로 뛰어든다. 토요일 아침 그가 출근하면서 선미를 불렀다.


"왜요?"


"오늘 저녁에 시간 있소?"


"시간이야 늘 있죠. 무슨 일 있어요?"


"오늘 저녁에 친구들 모임이 있는데 녀석들이 자꾸만 당신을 데리고 나오라고 하니 같이 갑시다."


"그래요?"


"내가 시간 맞춰서 가게 앞으로 가리다."


"전화하세요. 준비하고 있을 게요."


"고맙소."

 

그의 친구들이라면 술집에서도 몇 번 만났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명수는 차를 집 앞에 세워두고 택시를 잡았다. 얼마가지 않고 내리니 모이는 장소는 숯불갈비 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모두 모여 있었고 벌써 테이블에서는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환풍기가 돌아가는데도 온통 연기가 자욱하다.

 

테이블 한쪽에 대 여섯 명 씩 앉았으니 열 명이 넘는 것 같다. 모두들 반갑게 그녀를 맞아주었고 악수를 청하며 마냥 손을 잡고 있는 짓궂은 사람도 있다. 그들 중에 결혼한 사람은 두 명밖에 없다. 무슨 노총각 파티 하는 기분이다.

 

소주잔이 이리저리 정신없이 오고가고 얼마 후 얼굴들이 모두 울긋불긋 해졌다. 거의 비슷한 업종으로 사업들을 하다보니 얘깃거리도 일 얘기다. 그러다 어느새 여자 얘기가 나오더니 결혼 얘기로 진전이 되어 서로 선 봤던 경험들을 털어놓는다.

 

기분 좋게 술이 취하다보니 애기들도 참 재미있게 한다. 그러다 선미의 귀를 곧추 세우게 하는 말이 나왔다.


"야 명수 너! 지난 설날에 고향 가서 선 봤다며. 어떻게 됐냐?"


"어떻게 되긴 끝났지. 여기 재수 씨가 떡 버티고 있는데..."


"근데 선은 왜 보냐?"

 

명수는 묵묵히 술잔을 들었다.


"동네 어른들이 주선을 했는데 거절을 할 수가 없었어. 어머니도 보길 원하시고...."


"명수 넌 어땠는데 옥돌메던?"


"아가씨는 참하고 예쁘던데....나이도 좀 어리고."


"야! 너 땡잡았는데...."

 

그때 옆자리에 친구가 툭 치는 걸 언뜻 보았다. 

 
"어떻게 하기로 했냐. 너 안 할거면 나 소개 시켜 주라."


"다 좋은데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랑 사나봐. 명수어머니는 그게 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시더군."

 

명수랑 같은 고향이며 집도 같은 동네여서 설날에도 같이 다녀온 친구가 명수 대변인  처럼 꼬박꼬박 대답을 한다.


"야 임마 그럼 결혼 할 사람 있다고 얘기하지"

 

그렇다. 선미는 왠지 서운했다. 아직은 서로 확실하게 못을 박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사실 아닌가.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둘은 서로 얼굴을 외면 한 체 아무 말이 없다. 선을 봤다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그 아가씨가 엄마가 없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꺼려한다면 선미는 완전 고아나 마찬가지인데 더더욱 안 되는 거 아닌가. 혹시 그 이유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은 걸까? 갑자기 그녀의 가슴에 서리 가 내리는 것 같다. 온 몸이 시려와 떨려온다.

 

"춥소? 왜 떨고 있소?"


그가 선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참 따뜻하다. 택시 안이 아니었다면 그의 품에 안겨 시린 가슴을 녹이고 싶은 충동이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살며시 그의 손을 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