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비치 2005. 11. 1. 12:24

23. 고독한 자존심.

 

"우리 오랜만에 저기서 한잔 더 하고 들어가지."


택시에서 내리더니 명수는 골목입구 공터에 있는 포장마차 쪽으로 발길을 돌려 먼저 들어갔다. 뭔가 선미의 심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마음도 편치는 않다. 그대로 집에 들어가기가 서먹했으리라.

 

포장마차 안은 따뜻하다. 사실 둘 다 술은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지만 달리 어떻게 해야 서로의 어색한 이 순간을 모면할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해서 이 착잡함을 해소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는 안주는 외면한 채 연거푸 소주를 두 어 잔 입 속으로 부어 넣었다. 선미는 잔 가득히 부어져 있는 술잔을 손끝으로 톡톡 치기만 하며 생각에 잠겼다.

 

"한잔해요."


"........."


"나한테 할 얘기 있으면 해요."


"왜 내가 할 얘기가 있다고 생각하죠?"


"아니....난..... 아까...저...."


"그래요. 나!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아니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지 해봐요."


"명수 씨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잖아요."


"...... 선 봤다는 것 때문이요?"


"아뇨! 난 명수 씨를 알 것 같으면서 이럴 땐 너무 모르겠어요.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마음으로 나를 대하는지....정말 궁금해요."


"뭐가 그렇게 궁금하단 말이오. 난 당신을 사랑하오. 그건 진심이오. 그러면 되잖소."


"사랑이란 누구나 쉽게 하는 가식적이고도 바람 같은 거예요. 우리는 사랑 타령이나 하는 철없이 어린 사람들이 아니 예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받을 만큼의 고통도 다 맛본 사람들이고 결혼할 사이라고요. 물론 사랑하니까 결혼하는 거겠죠?"


"그렇소. 난 당신을 사랑하오.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고. 그 마음은 변함이 없소."


"그럼 왜 선 보라고 할 때 어머님께 라든지 형님한테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죠?"


"그건..... 갑자기 얘기하기가...."


"갑자기 라니 요? 공장 가까이 형님이 계시잖아요. 우리 동거 한지도 백일이 다 되어 가는데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어요. 당신도 이미 자신 있게 말못할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 까 말하지 못했던 거 아닌가요?"


"이유가 뭐 있겠소."


"나한테는 울타리가 되어줄 부모도 형제도 없고 고아나 마찬가지로 살아왔어요. 그것이  험 이라면 험 이죠. 당신 집안에서는 나 같은 며느리는 안 되는 거잖아요? 왜! 진작 말하지 않았죠?"


"선미! 난 당신과 헤어지기도 싫거니와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도 않소. 누가 반대를 하더라도 난 당신과 결혼 할거요."


"어떻게 말도 안 되요. 반대하는 결혼해서 나더러 평생 당신집안과 등지고 살게 하고 싶어요?. 그럼 내가 못 살아요. 차라리...."


"차라리 뭐요?"


"차라리....결혼을 안 하는 한이 있어도 반대하는 결혼은 내가 할 수 없다 구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소?"


"말이 아니면....선을 본 아가씨가 다 마음에 드는데 엄마가 없다는 이유로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해서 퇴짜를 놨다면 난 아무도 없으니 아예 결혼의 '결'자도 꺼내지 못하고 거론할 가치도 없는 인간 취급받을 거 같아 아닌가요?"


"내가 알아서 하리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꼭 허락을 받아 낼 거요,"


"모르겠어요. 뭘 믿어야 할지. 자신의 행동도 어쩌지 못하는 바람둥이 말을 어떻게 믿어요. 당신 어머니는 이런 당신의 술버릇을 알고는 계신가요? 가슴에 바람만 잔뜩 들어있는 아들인 줄도 모르고 남의 가정 탓만 하시다니 불쌍하네요."


"듣기가 거북하군. 그만하지. 내가 미안하게 됐소."

 

두 사람은 더 이상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오는 동안 그는 선미의 어깨를 감싸안고 걸었다. 아무도 그들의 사랑에 콩 나라 팥 나라 간섭하지 말아주길 빌면서...누구도 그들의 앞날에 대하여 왈가왈부 하지 말고 내버려두었으면....

 

"우리 한번만 꼭 안아보면 안될까?"


거실로 들어온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온다.


"난 아직 당신이 두려워요. 아직은 믿을 수가 없단 말예요."


"우리 이제 계약 깨어버리면....."


"안녕히 주무세요!"


그녀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 문을 안으로 잠궈 버렸다. 갑자기 그가 무서워지는 게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동거 계약을 깨자고 할 때 하마터면 대뜸 그러자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서로 이제까지 잘 참아 왔는데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지만 아직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다보니 믿지를 못하는 거다.

 

둘만 있을 때와 다른 여자들과 있을 때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들과 있을 때는 선미 자신은 궁궐에서 잔치가 벌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웃고 즐기며 마음껏 노는데 왕은 혼자서 빙긋이 미소만 띠며 외롭게 앉아있는 그런 왕의 모습과 같아 자신은 더욱 고독하고 쓸쓸해진다. 차라리 그들과 똑같이 떠들고 웃고 마시고 싶다.

 

그는 선미를 왕처럼 대하면서도 다른 여자들과는 아무렇게나 웃고 놀고 떠든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 있으려니 얼굴은 웃고 있어도 속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른다. 그러면서도 함부로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체면도 있지만 순전히 자신의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기댈 곳 없이 혼자 살아오면서 자칫하면 가정교육이 어떻고 부모의 정을 받지 못하고 살아서 자유분방하고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이 싫어 늘 자신감을 스스로 불어 넣다보니 자존심만 강해졌다. 그러다 보니 마음과 행동이 다를 때가 허다하다. 아니 명수와 만나기 전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선미 자신도 어느 순간이면 참을 수 없는 열정에 사로잡혀 당장 그의 품에 달려들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그러다 거절당하면 그 수치감을 어떻게 감당할까 두려웠었다. 그것 또한 한 가닥 자존심일거다. 하긴 자존심이라도 있기에 그것하나로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살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정신은 더욱 맑아진다. 어지간히 술도 마셔댔는데 그전 같으면 벌써 골아 떨어지련만.....

 

뱃속 저 아래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치솟아 오르는 것 같더니 온 몸으로 번져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뜨거워지는 것 같다. 숨이 막혀 오는가 싶더니 목 이 바짝 타는 것 같다.

 

선미가 물을 마시려고 주방으로 들어갈 때 명수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목이 말라 물을 찾아 나왔다. 선미는 냉수를 한잔 벌컥거리며 마시자 뜨거웠던 열기가 조금 식는 듯 했다. 냉장고문을 닫으며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토한다. 돌아서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어요?"


"으음..저...금방 물 좀 마시려고..."


"그래요? 나도...술이 깨려나봐요. 목이 타네요."

 

그녀는 얼른 물병을 꺼내 컵에 가득 부었다. 그도 단숨에 벌컥거리며 마셨다.


"아...시원하다."


"그렇죠?"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보이지는 않지만 두 사람의 가슴은 뭐라고 표현 할 수 없이 착잡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사랑하면서도 마음껏 손을 잡지도 못하고 포옹조차도 할 수가 없으니

...에라이 그냥 규칙이고 뭐고 깨버릴까 보다....


그러다가도 행여나 그러다 아주 도망쳐 버릴 것만 같기에 조심스러워 용기조차도 내지 못한다.

.....체! 무슨 남자가 저리도 겁이 많은지...한번쯤 와락 안아주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내가 안겨버릴까? 아냐 괜히 그러다 이상한 여자로 보면 어쩌지?...에이 속상해...하지만 이제 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지켜야지....

 

"물 더 드려요?"


"아 아니 됐소...당신도 어서 들어가 쉬어요."


"네...그래요. 명수 씨도 쉬세요."

 
그녀가 막 방문을 열려고 하자


"저...선미!"


"네?"


갑자기 가슴이 뛰면서 그가 부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는 활짝 웃으며 돌아섰다.


"잘.... 자요."


그가 돌아서 자신의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저...."


"응?"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뒤돌아 섰다. 뭔가 잔뜩 기대에 부푼 표정이다.


"당신도 잘 자라구요."


"아...그래요."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기..."


"저....."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선미! 내가 먼저 얘기하리다. 당신도 내 마음과 같으리라 믿소. 우리 지금 이 순간만큼 모든 거 다 내 던지고 자신에 대해서 솔직해 봅시다. 나..지금 당신이 몹시 그립소. 한번이라도 좋으니 당신을 내 품에 안아보고 싶소. 그래도 되겠소? 아니 그러게 해 주시오. 한번만 안아보고 싶소. 선미! 부탁이오."

 

그의 두 눈은 뜨거운 열기 때문인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있는 선미도 열기가 목구멍을 후비고 튀어나와 뜨거운 입김이 다물고 있는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들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없어지고 두 사람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서서 서로의 뜨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열기가 너무 뜨거워 둘은 떨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