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자전적 소설/◈연재소설-1.날고싶은 새(종결)

날고 싶은 새<2>새로운 운명

보라비치 2005. 10. 8. 10:10

2.새로운 운명
 
 아침부터 한껏 들떠있는 두 모녀는 정신없이 부산하다. 어떤 한복을 입을지

엄마는 아까부터 거울 앞을 왔다 갔다 하신다. 윤정 이는 하얀 레이스가 곱게

달린 블라우스에 까만 멜빵 주름치마를 입었고 하얀 타이즈 에 검은 구두가

더욱 빛난다. 옷은 며칠 전 양장점에 가서 맞춘 것이다. 


 오늘은 윤정이 국민학교 입학식 날이다. 가슴엔 '이 윤정'이라고 적힌 커다란

이름표를 달았다.

부산에 도착한 뒷날 어느 중년의 신사가 집에 오셨는데 그 분이 아버지라고

하셨다. 뭔 진 모르지만 머릿속이 복잡해  지는 것 같아 멍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엄마는

제 빨리 자초지종 설명을 해 주셨다.

몸이 약한 엄마가 그녀를 낳고서 젖이 나오지 않자 서울에 계신 이모에게 부탁을 해서,

그녀를 데려다 키워준 사람들이 지금까지 엄마 아버지라고 불렀던

사람들 이란다.


"잘 키워줘서 고맙긴 한데 너무 못살아서 네가 그 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그 일만 아니었어도 진작 데려 왔을 텐데...이제 그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넌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되 알았지?"

 

그 일이란 엄마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들이 돈을 갚을 수가 없자 도망을 가버리는 바람에

]그들을 뒤쫓아 대구, 대전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결국 잡았는데 또

재판 때문에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단다. 아직은 어린 그녀로서는 모든 게 사실

같아 믿을 수밖에....

 

"이제 집에도 돌아왔고 학교 입학도 해야 하니까 원래 이름으로 바꿔야 되겠지?"


그래서 여태껏 불려졌던 '정 명언'이가 아닌 '이 윤정'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언니도 가지 못하던 학교인데 아무 말도, 아무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사나흘에 한번씩 오셔서는 몇 시간 후면 돌아가셨다. 사업 때문에 일본 등 외국을 자주 나가시며

너무 바빠서 오래 있질 못하신 단다. 가끔씩 엄마랑

두 분 이서 일본말로 대화를 하시고 요리도 일본식으로 하셨다. 스끼야끼 라는

요리를 주로 많이 하셨다.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 운동장에 아이들이 선생님들의 구령에 맞춰 줄을 서고

배가 불룩 나오고 이마가 훌렁 벗겨진 교장의 학교소개와 인사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제 멋대로 들이다.

 

햇살이 제법 따뜻해져 오고 아이 들 몸이 뒤틀릴 즈음 교실로 들어가 담임선생님의 당부 말씀을 끝으로

입학식은 끝났다.


"건널목에서는 파란 불이 켜지더라도 차가 오는지 양쪽을 꼭 확인하고, 장난치지 말고, 앞만 똑바로

보고 건너야 해요. 알았죠?"


"네"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며 한마디도 듣지 않는 거 같던 아이들이 대답은 모두 똑같이 한다.
 
윤정 이는 엄마를 따라 교무실로 들어갔다. 여러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교장실로

들어가니 대머리 교장이 무겁게 보이는 배를 내밀며 벌떡 일어나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강 여사가 미인이시니 따님도 엄마를 닮았군요. 아이고 어짜믄 요렇게 이쁘노.

하하하..."


"그래요? 감사합니다."


엄마는 조금은 작은 몸집에 갸름한 동양적인 미인형 얼굴이다. 영화배우 김 지미를

닮았다.
어른이나 아이나 예쁘다는 말에는 기분이 좋아지나 보다. 서로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끝으로 교무실을 나왔다.

 

 한동안 엄마와 함께 등교를 하다가 혼자 다니게 되었다. 그 대신 등교하기 전

선생님 말씀과 똑같은 말을 매일 네다섯 번은 다짐받고 서야 나설 수가 있었다.

 

<신호등 확인, 학교마치면 곧장 오기, 길을 걸을 땐 한눈 팔지 말기 등등>.

 

입학한지 두어 달이 되었을 때 엄마친구의 딸이 가정교사로 왔다. 이름은 김 민자이고 큰 키가

잘 어울리는 몸매에 수더분한 얼굴이 다정해 보였다. 선생님보다

언니라고 부르란다. 그래서 더욱 친근감이 가는가보다. 재미있는 얘기도

잘해주시고 그림도 아주 잘 그리셨다.


 엄마는 일수를 하셨다. 옛날에 요리 집을 하면서 돈을 좀 많이 벌었다한다.

그때 밑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엄마에게 일수를 내서 장사를 시작해 그날그날 판

돈 에서 원금과 이자를 갚는 것이다. 그 돈을 걷으러 엄마는 매일 외출을 하셨다. 집안일 하는 아줌마도

엄마에게 도움을 많이 받으신 단다.

 

 엄마는 나가 시면서도 그녀에게는 꼭 공부만 하란다. 그녀는 혼자 있는 날에는

누워서 빈둥거리다가 엄마 들어오시는 소리 들리면 얼른 일어나 앉아 공부하는

척도 했다.

밖에 나가서 놀지도 못하게 하고 어쩌다가 허락이 떨어지면 유일하게 놀아주는

친구는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남자아이인 영진 이다. 성격이 계집애처럼 조용하다보니 윤정이 와는

잘 맞아 둘이서 소꿉놀이도 하곤 한다.

 

영진 이 가족은 큰할머니,작은할머니,아버지,엄마,여동생,남동생해서 모두

일곱 명이다. 가족이 많다보니 고기 반찬은 잘 해먹지 못하는 터라 거의 매일

고기를 먹다 시피 하는 윤정 이는 엄마나 아줌마가 밥 차려주고 외출하실 땐

영진 이를 불러서 먹으라곤 했다.

영진 이 아버지가 마당에 작은 탁구대도 만들어 주셨다.

 

 이 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오후엔 더우니까 일찍 공부하자며 김 민자선생님이 아침에 오셨다.
선생님께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엄마도 서둘러 나가셨다. 그림을 좋아하는

선생님은 그림일기를 많이 도와 주셨다. 그 때문에 윤정 이도 그림을 잘 그리게

된 건 아닌지....
 
 얼마나 지났을까 인기척 소리에 내다보니 아버지가 오셨다. 한참 유행하는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는 멋으로 들고 다니 신 단다. 짙은 회색양복이 너무 잘

어울리는 모습이 영화배우 김 진규 와 너무 닮았다. 엄마랑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한 손에 봉투를 들고 계셨는데 맥주 몇 병과 오징어, 땅콩이 들어있었다.

과자는 엄마가 상자 때기로 미리 사다놓기 때문에 일부러 사올 필요가 없다.

 

엄마도 안 계시고 일하는 아줌마도 오늘은 오후에 오시기 때문에 할 수없이

선생님이 과일도 깍아서 맥주랑 차려 주셨다.


"더운 날씨에 민자가 수고가 많구만. 잠시 쉬면서 시원하게 한 잔 하지 그래."


혼자서 심심하신 모양이다. 시험지를 검토 중이던 선생님이 깜짝 놀라며 사양을

하였지만 마지못해 거실로 나가시며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따라주는 맥주를 받아서  반정도 마시고는 다른 잔을 가져와 막 따르려 하는데

엄마가 들어오시다가 이 광경을 보시게 됐다.


"아니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어허! 시원한 맥주를 사왔는데 당신도 없고... 민자가 더운 날씨에 수고하는 거 같아

잠시 쉬라고 했지."


"뭐예요? 그래서 공부 가르치는 선생인데 애도 보는 앞에서 술을 먹여요?"


엄마가 그렇게 크게 화내시는 건 처음이다. 당황한 선생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민자야! 윤정이 아버지가 실수를 하신 모양인데 이해하고 오늘은 그만 가봐라."


"아니 저.....네! 죄송해요 어머니!"


 황급히 선생님이 나가자 엄마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두 분은 싸우기 시작했다.

싸움이라 해봐야 엄마 혼자 일방적으로 화를 내셨다.


"아무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사람 무안하게 만들고 그러나 사람 참!"


"뭐라고요? 그럼 애 앞에서 추파 던지며 술 먹인 게 잘했단 말예요?"


"추파라니! 함부로 그런 말하는 거 아니요. 민자는 당신 친구 딸인데. 내가 어떻게

나쁜 맘을 먹겠소. 쓸데없는 소리 그만두고 한잔합시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아버지 말투가 엄마의 자존심을 더 상하게 만들어 버린 거

같다. 막무가내 다구치는 엄마의 잔소리에 아버지도 화가 나시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으시고

옷을 챙겨 입으시고 모자도 쓰셨다.


"앉아있어 봐야 좋은 말 못들을 거고 갈 테니까 당신 혼자 실컷 떠드시오. 윤정아 공부 열심히 해라."

 

 아버지가 나가시고 화가 풀리지 않은 엄마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버린다.

마침 아줌마가 들어오다 엄마 모습을 보고 놀라며 호들갑이다.


"아이고! 사모님이 우짠일이 시레유? 술도 잘 못하시는 양반이 으잉?"


엄마는 일어나더니 약간 비틀거리며 장롱에 붙은 커다란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가 싶었는데 갑자기 주먹으로 거울을 쳤다. 말릴 새 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쨍그랑 소리가 나면서 유리조각은 산산조각이 나고 순간

엄마 손목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아이고 이를 어쩌유. 사모님 오늘 참말로 왜 이러 시능가 모르것네유이.

윤정아 깨끗한 수건 좀 갖고 오니라. 아이고 대체 무슨 일 이레?"


놀라서 우두커니 쳐다보고만 있던 그녀는 얼른 수건을 가져왔다.


"병원 다녀와서 치울 테니 께 유리조각 손대지 말거라 잉?"


아줌마는 수건으로 엄마 손목을 둘둘 싸메 더니 병원 간다며 황급히 나갔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