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자전적 소설/◈연재소설-1.날고싶은 새(종결)

연재;날고싶은 새<34> 이 여자가 사는 이유

보라비치 2005. 11. 10. 10:54

 34. 이 여자가 사는 이유.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면 뜬눈으로 밤을 새는데 밤새 윤정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환상 때문이다.

벌거벗은 남녀가 숨을 헐떡이며 뒹구는 모습 중에 남자는 분명 자신의 남편인데 상대여자는 호프집

숙희라는 여자였다가 수민이 엄마였다가 또 다른 얼굴의 여자들 그러다 문득 모두가 짐승들의 탈을

뒤집어쓰고 자맥질을 해대고 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을 맴돌며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다.
 수면제 한 알만 먹으면 금새 깨어 나버려 언제부턴가 두 알, 세 알 늘어만 갔다.

 

 어느 날,
 낮부터 윤정 이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자꾸만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환영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수면제가 들은 병을 꺼내보니 이십 여알 남아있었다.

 

<제기랄! 이거 먹어도 죽을 수 있을까? 빌어먹을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거지.>


그녀는 약을 다 털어 물도 아닌 술로 마셔 버렸다.

 

<산다는 것은 너무 힘들고 피곤해. 애들은 이제 다 컸으니 이 못난 엄마가 아니라도 알아서 살아 주겠지? 그래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 버렸으면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이 지루하고 더럽고 긴 연극이 끝날 테니까.>

 

가슴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길게 누웠다. 세상이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아간다. 자신과 함께 환상 속의 남자 여자들도 엉긴 체 덩달아 돌고 있다. 마음을 다 비우고 나니 너무 편안하다.


 
            *****               *****                *****

 

 해가 저문지도 한참이나 됐는데도 집안은 온통 깜깜 하다. 아이들이 들어와 불을 켜고 방안을 들여다보니 엄마가 곤히 잠들어 있다, 그 옆에는 빈 술병들과 약병이 놓여있다.

또 술에 취해 잠든 것이리라 생각하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주방으로 가서 라면을 끓인다. 마음이 아프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항상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주시고 하셨는데 얼마 전부터 엄마는 변해가고 있었다.

 

 <불쌍한 우리 엄마! 다른 엄마들처럼 예쁜 옷도 안사입고 늘 허름한 싸구려 옷만 사 입고 맛있는 것도 우리만 챙겨 주셨는데 그런 엄마한테 아빠는 한번도 선물도 할 줄 모르고 다른 아빠들처럼 외식도 잘 안하고 놀러 도 안 간다. 우리 엄마가 너무 불쌍해.>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가 난다.


"엄마는?"


" 방에 주무셔요. 오늘도 술 드셨나 봐요."


"잘한다. 살림하는 여자가 대낮부터 술이나 퍼 마시고 애들 교육 잘 되겠다. 에이!"


"아빠! 엄마가 저러시는 거 아빠한테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니 예요?"


"뭐라 구? 너희들 머리통 좀 컸다고 아빠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엄마라는 사람이 저러니 애들 교육이 이 모양이지."


"엄마만 나무랄 거 없어요. 우리도 이제 뭐가 잘못된 건지는 알 수 있다 구요. 아빠가 엄마한테 좀 더 신경 쓰고 다정하게 해 보세요."


"시끄러워 가서 공부들이나 해"


 아침이 되어도 아내가 일어나지 않아 형서는 그때서야 아내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본다.


"이봐! 이제 정신 차리고 일어나야지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아직 못 일어나?"


 몇 번을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다. 머리맡에 있는 약병을 보니 한 알도 없다.


"아니 이 여자가...."


 순간 섬뜩한 생각에 가슴에 귀를 대보니 심장은 뛰고 있지만 숨소리도 그렇고 아주 작게 들리는 것이 아닌가. 형서는 아이들을 불러 차 문을 열게 하고 아내를 들쳐업고 차에 태웠다. 십분 정도 거리에 병원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두 시간은 더 걸리는 것 같았고 신호는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병원 응급실로 데려가니 의사가 이것저것 체크를 하더니


"크게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약 기운 때문에 아주머니가 지금 아주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술을 많이 마신 데다가 약을 많이 먹어서 위장이 다 헐어 있으니 치료를 받으셔야 하겠군요. 그런데 약은 언제 먹었나 요? 술은 언제 마셨습니까?"


"그게..저.. 어제 낮에 마신 거 같은데요. 약도 그때..."


"네? 아니 어제 낮에 약을 먹었는데 이제 데리고 오십니까? 집에 아무도 없었나 요?"


"그건 아니고 우리는 이 사람이 술이 취해서 잠자는 줄만 알았죠."


"약 분량이 적었으니 다행이었지만 술 마시고 나서 수면제 복용하면 아주 위험합니다. 무슨 문제라도..."


"요즘 집사람이 신경이 예민해져서 불면증 때문에 술이나 약을 먹어야 잠을 자더군요."


"입원 하셔서 치료도 받으시고 신경 정신과 담당의 하고도 상담을 해 보십시오."

 

 윤정 이는 입원실로 옮겨지고 그날 꼬박 잠을 자고 한 밤중이 되서야 정신이 들었다. 뿌연 안개 속에 희미한 빛이 반짝거린다. 천당 가는 길인가. 지옥 가는 길인가. 아니다. 천당 들어가는 길은 매우 험하다고 하던데 빛이 환하게 비치는걸 보니 지옥으로 가나보다.


"엄마! 엄마! 정신들었어? 눈 좀 크게 떠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이 이곳에 왜 왔지? 안돼! 여기는 나만 가야돼. 너희들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오면 안돼! 가!>


"엄마!..."


손을 잡고 막 흔들어대니 엄마는 눈을 뜨고는 아이들을 둘러본다.


"얘들아. 여기 어디야?"


"병원이야. 엄마! 인제 술 마시지 말아요. 이러다 알콜중독 되겠어요. 우리가 잘할게 요. 응?"


"병원? 그럼 나 괜찮니? 여긴 어떻게 왔어?"


"아침에 아빠가 데리고 왔어요."


"아빠가? 지금 어딨어?"


"엄마 괜찮다는 소리 듣고 아까 집에 가셨어. 내일 아침에 출장 가야 된데요."


"그래? 엄마가 이런데. 출장 간다고?"


뭘 기대 했었나. 맨 날 집에 들어오면 마누라 입에서 술 냄새나 푹푹 나고 눈을 씻고 봐도 애교라고는 없는 여자를 보는 남편인들 오죽하랴. 하지만 그런 줄 알면서도 아직 조금은 남아있는 남편에 대한 미련의 벽은 자꾸만 무너지고 있다.

 

 이틀 후,
형서는 저녁 때 퇴근을 해서야 병원을 찾아왔다.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더니 퇴원을 하겠다고 한다.


"위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아주머니가 지금 우울증이 심한 것 같아서 정신과 닥터한테 얘기 해 놨으니까 내일부터 정신과 치료를 했으면 합니다."


"일단 퇴원했다가 그건 외래 진찰 받았으면 하는데요. 애들 때문에 엄마가 집에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딱히 살림 돌봐줄 사람이 없거든요."


"이왕이면 입원했을 때 받아 보는 것이 좋을 테지만 정 원하시면 그렇게 하시지요. 일단 환자 분의 심리 상태를 봐선 위험 할 수도 있으니 가족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셔야 할겁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퇴원 수속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 차안에서 둘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서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집에 들어오니 오랫동안 비웠던 것같이 집안이 낯설어 보인다. 방안 천장을 쳐다보고 누워 있으려니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고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흐른다. 아마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나보다.


 그로부터 윤정 이의 하루 일과는 아침에 남편과 아이들 나가고 나면 집안 청소, 빨래, 설거지는 건성으로 대충해버리고 병원에서 준 약 먹고 누워서 하루 종일 잠을 자는 것이다.

 

병원은 대학병원 정신과 담당 교수로 있다가 몇 년 전에 개인 병원을 개원한 형서의 선배가 운영하는 신경정신과병원을 다닌다. 일주일에 한번만 가서 정신과 상담하고 약도 일주일분씩 가져온다.

 

 아무 의욕도 없이 시들하고 희망도 없이 축 늘어져 목숨이 붙어있으니 사는 것이고, 하루종일 말도 없이 그냥 입이 뚫려 있으니 밥을 먹는 것이다. 눈동자는 초점도 없이 멍하니 허공만 쳐다본다.

 

어느 날 일요일아침
여느 때처럼 아침밥을 밥을 먹고 나니 형서는 외출을 하려는지 옷을 갈아입었다. 아이들도 친구들과 약속 있다며 나가려 하고 있다. 잠시 후 애들이 먼저 나가고 뒤이어 형서도 나가려는데 갑자기 윤정 이는 먹으려고 손에 들고있던 약과 나머지 약봉지를 남편을 향해 던져버린다.


"그래! 나가 다 나가라 구. 좋겠네 갈 때 많아서. 도대체 너희들이 뭔데 나를 이렇게 만들어? 내가 왜 이런 약이나 먹어야 하는데? 나를 요 꼴로 만들어 집구석에 쳐 박아 놓고 너는 나가서 네 활개치고 돌아다니니까 좋지? 좋을 테지. 좋을 거야."


 윤정 이는 미친 듯이 웃어 재끼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형서는 말없이 서 있다가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녀는 바닥에 흐트러진 약들을 주워 모아 몽땅 입에 털어 넣어 먹어버렸다. 그때 나갔던 형서가 다시 들어오다 이 광경을 보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일요일이라 병원은 문을 닫았을 테고 선배의 집에다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선배님 저 한형서 입니다. 아내가 지금 약을 다 먹어 버렸는데 괜찮을 까요?"


"약이 얼마나 남아 있었지?"


"병원에 갔다 온지가 삼일 됐으니까 삼일 분되겠네 요."


"아 그럼 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진정제가 들어 있어서 많이 먹으면 위험한데. 약에 취해서 잠을 많이 잘텐데 물도 많이 먹이고 잘 지켜봤다가 내일 아침에 병원에 데리고 와."


 
 윤정 이는 새벽녘쯤이 되서야 눈을 떴다. 눈은 뜨고 있지만 손가락도 움직일 수가 없이 기운이 하나도 없다. 아무리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꼼짝을 할 수가 없다.

 

사는 게 뭔지. 뭐 좋은걸 보고 살 거라고 또 눈은 뜨이는지. 인간의 목숨이 제일 질기다더니 죽고 싶어도 마음놓고 죽지도 못하는 년의 팔자.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졌기에 이렇게 벌을 받고 사는지. 가난하게 태어난 탓으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다른 사람의 딸이 되었고 빛 좋은 개살구로 살다 결국 벗어난 곳이 뭇 사내들의 술시중이나 드는 직업을 택해 여자로서는 정말 치욕스런 나날들이었지.

 

 진정한 사랑이 뭔지도 몰라 사랑도 할 줄 모르고 받는 것조차 두려웠었는데 거부 할 수 없는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의 단단한 벽을 무너뜨린 남자 한형서를 만나 결혼을 했었는데 자신의 마음에서 사랑이 싹트기도 전에 남편은 무참히도 짓밟아 버렸다.

 

같이 살아도 남과 같고 남인 것 같으면서도 남이 아닌 사람과 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그녀의 베개는 어느새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다.

 아침이 되어 형서는 아내를 태워 병원으로 향했다.


"당신 자꾸 이럴 거야? 당신이 정신을 차려야지. 애들 한 테 미안하지도 않아? 나도 너 이러는 거 지겹다."


"지금 누가 누구 더러 정신 차리래요? 당신은 애들 한 테 떳떳한가 요? 나도 지겨워요. 당신도 지겨우니까 그냥 이혼 해주면 될걸 왜 싫다는 사람 붙들고 괴롭혀요?"


"내가 애들한테 떳떳하지 못할게 뭐가 있지? 이제 나도 잘살아 보려고 힘들게 사는데 당신 때문에 더 힘들어."


"허! 그래서 또 다른 편안한 여자를 찾았나 요?"


"무슨 소리야?"


 순간 움찔 놀라는 남편의 표정을 윤정 이는 놓치지 않았다. 병원 앞에서 차를 세우고


"혼자 들어가. 선배님한테는 내가 전화 할 테니까. 나는 지금 손님과 아침에 약속이 있어서 빨리 가야 되."

 

 <아무리 약속이 있어도 그렇지 혼자서는 걸음도 걷기 힘든데 잡아 주지도 않고 혼자 내려서 들어가라니 이런 사람을 남편이라고...>


 병원은 이층이라 겨우 계단의 난간에 몸을 지탱하며 올라갔다. 어찌나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지 한 걸음 때는 게 너무 힘이 든다. 병원을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간호사들이 놀라 부축을 해서는 침대에 눕혔다.


"아니 이런 몸으로 어떻게 왔어요?"


 원장도 간호사들도 놀라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링겔 주사를 꽂자 이내 윤정 이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때 전화벨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아니 이 사람아 여기까지 왔으면 같이 모시고 들어와야지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혼자 들여보내다니 자네 그러면 안되지. 자네한테 할 얘기도 있고 해서 같이 오라고 했는데 시간 내서 한번 들리게."


 한형서가 전화를 한 모양이다. 윤정 이가 눈을 떴을 때는 정오가 훨씬 지나 있었다. 간호사가 웃으며 쳐다본다.


"푹 주무셨어요? 더 자도 되니까 잠 오면 계속 주무세요."

 

 주사를 맞아서 그런지 잠을 푹 자서 그런지 몸이 조금 가벼워 졌다. 그녀는 한참을 누운 체로 천장 만 바라본다. 벌레무늬가 하얀 천장 제 이다. 하얀 커튼 사이로 초  가을 햇살이 바람과 함께 흔들리며 비집고 들어온다.


"기분이 좀 나아 지셨습니까?"


"네"


"왜 그러셨습니까? 무슨 속 상하는 일이라도...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지 말고 오늘 저 한테 다 얘기 해보세요. 혹시 남편하고 싸우셨습니까?"


 윤정 이는 일어나 앉으려니 어지러웠다가 괜찮아 졌다.


"아니 예요. 차라리 싸움이라도 속 시원히 했으면 좋겠어요. 남편은 자기 주장만 내 세우면서 내 얘기는 무시 해버려요."


"왜 무시한다고 생각하시죠? 그건 무시가 아니라 남자들은 비록 잘못을 저질렀어도 여자 앞에선 자신의 위신 때문에 큰소리치를 치며 자존심을 내세우게 되죠. 남편도 아마 그럴 겁니다. 마음으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박사님도 남자라고 남자 편을 들어서 좋게 얘기하시나 본데 더는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미안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면서도 내 앞에서 고개 치켜들고 큰 소리 치는 그 남자,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 인간은 내 손에 죽을 가치도 없는 인간 이예요. 남자들이 그렇게 잘 났나요? 여자들을 자기네들 노리개 감으로 좋으면 갖고 놀고 싫증나면 버리고... 박사님도 그러시나요?"


"하하하... 저는 능력이 없어서 못합니다. 농담이구요. 지금처럼 누구에게라도 속에 있는 말 그대로 탁 털어놓으세요. 아니면 저한테라도 오셔서 지금처럼 뱉어 버리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 질 겁니다. 얼마든지 들어 드릴 테니 알겠죠? 가슴속에 다 집어넣어 놓으면 그것이 병이 되는 겁니다. 술은 마시면 그 순간만 모면하는 것 밖에 안되니 약을 복용하면서 마음을 열어 보십시오. 사람들과 대화도 많이 나누고, 얘기를 들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더 좋지요. 친한 취미 생활도 하고 가끔 여행도 하면 더 좋지요."


"............"


"형서 한 테는 아까 제가 얘기했지만 집에 가시면 저 한 테 한번 들리라고 하십시오."

 

 저녁때가 다 되어 윤정 이는 병원을 나왔다. 하루종일 먹은 것이 없는 탓인지 기운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 버스를 탔다. 어디로 가는 버스인지 보지도 않고... 조금 가다가 내려서 또 걸었다. 그러다 지하철역이 보이자 그녀는 지하철을 탔다. 낮 익은 역에서 내려 다시 걷기 시작한다.


 한참을 걷다가 누군가 아는 사람과 인사를 했던 거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자들이 아무리 술이 취해도 집에는 잘 찾아온다더니 윤정 이가 지금 그렇다. 비록 술에 취한 것은 아니어도 무의식중에 집에까지 와 버린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이들이 와르르 달려와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엄마의 손을 잡아준다.


"엄마! 왜 이제 오세요? 병원에서는 나간지 오래 됐던데 어디 갔었어요? 전화라도 해주지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그제 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살피니 어느새 집에까지 왔다.

 

<체! 나 같은 년은 갈 데도 없다니까. 오직 갈 때가 없으면 나도 모르게 집에 왔냐. 이 년에 다리는 다른 곳에 갈 줄도 모르나봐?>

 

 남편은 들어오는 아내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TV쪽으로 고개를 돌렷다. 멍청히 서있는 엄마를 아이들이 주방으로 데려갔다.


"엄마! 우리가 엄마 오면 잡수라고 쇠고기 죽 끓였다. 먹어봐요."


"그래? 맛있겠네. 고마워"

 

요즘은 엄마가 간식요리를 잘 안 해주니까 저희들끼리 알아서 잘 해먹었다. 서투르지만 제법 맛이 좋았다. 묽은 죽인데도 입안에서 뱅 돌아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끓여준 아이들의 성의를 봐서 억지로 국물만 떠먹었다. 눈물이 나오려고 콧등이 시려온다.

 

<그나마 아이들이 있기에 살아갈 희망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 엄마가 되어서 이 못난 꼴을 보여 주나. 모든 건 운명이려니 차라리 받아들이자. 어쩌면 남편은 나 스스로 망가져 주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지 그래서 이혼을 안 해 주는 걸 거야.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택했던 자책 때문에 나에게 복수를 하는 걸 거야. 어차피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살자고 다짐했으니 나 스스로 정신 차리고 더 열심히 살아 야지? 그것만이 그에 대한 나의 복수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걸 보여 줘야지.>

윤정 이는 약봉지를 몽땅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