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우연히 만난 여자.
새벽 일찌감치 나온 청소원들이 애써 쓸어모은 낙엽들이 바람에 제 멋대로 굴러가 버리면 허탈감에 멍하니 애꿎은 나무만 쳐다보다 아직 가지에 남아있는 나뭇잎을 빗자루로 쳐서 떨어뜨리느라 부산하다.
짙은 국화 향이 사라지고 길거리는 온통 징글벨이 울려 퍼지는 십이월,
일요일은 예식비가 비싸다고 평일 날을 잡아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그들 때문에 선미는 또 한번 놀랬다. 젊은 사람들이라 결혼을 가볍게 생각한다 했더니 필이 꽂혔다나 어쨌다나 하더니 젊은이들답지 않게 예식 비까지 꼼꼼히 따지다니... 저 나이엔 더 좋은 곳에서 더 좋게 더 크게 하고 싶은 게 결혼식일텐데 말이다. 신혼여행도 제주도라도 가려나 했더니 경주로 이박삼일 갔다 온단다. 대단한 살림꾼들이다.
결혼식 날,
선미는 두 사람의 결혼식 날 만큼은 가게문을 닫기로 했다. 화환은 이미 식장으로 배달을 시켜 놨고, 고맙다는 인사로 둘이 돈을 합쳐서 기어코 그녀에게 투피스 한 벌 사 주었다. 저희들도 잘 안 사 입는 백화점에 가서....처음엔 가서 바꿔 오라고 했지만 결혼식 날 꼭 입어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받기로 했다.
평일이라 식장 안은 한산했고 축하객들도 거의 친척들이었다. 김 군은 조금 빠르다 고나 할까. 하지만 미스 리는 꽉 찬 나이인데다가 미용 실 단골손님들이 제법 많았다.
예식이 끝나고 선미는 연주 농장으로 갔다. 시내를 벗어난 외각 지여서 그런지 한시간여나 걸려서 도착했다.
큰 비닐하우스가 나란히 보이고 화회농장이라 그런지 곳곳에 화분 깨어진 것들 조경용 돌들이 쌓여 있었다.
"어머머 얘! 오면 온다고 전화라도 하고 오지 이게 뭐야?"
"놀래켜 줄려고... 서방님은 어디 가셨니?"
"응! 다른 농장에 일 좀 거들어 주러 갔어."
"심심하겠다. 사람이 없어서..."
"웬 걸 처음엔 우울증 올 뻔했는데 지금은 저쪽으로 두 군데나 생겨서 일없을 땐 그 사람들이 이리 오기도 하고 내가 가서 잘 놀아. 그리고 뭐 심심하면 화분에 물도 주고 하다보면 하루가 후딱 지나가."
"재미있니?"
"재미라니? 이런데 취미 있는 사람이나 좋지 난 이런 거 적성에 맞지 않아서 인지 사실 지금도 어떤 때는 뛰쳐나가고 싶어."
"네 남편은 좋아라 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주 신났어 마누라 눈앞에 두니까 마음이 놓이나봐. 여자가 너무 예뻐도 귀찮다니까..."
두 여자는 모처럼 마음놓고 웃었다. 하우스 안에 들어가 여러 가지 야생화도보고 그 야생화를 돌에 붙여서 조그만 물레방아를 만들어 놓은 작은 연못도 구경했다.
"연주야 나는 말야. 이런데서 살고 싶어. 하루종일 화초들과 대화도하고..."
"그래서 넌 화원 하잖아. 난 어쩔 수없이 이렇게 살지. 답답해서 싫어. 사람은 자고로 넓은 데로 나가서 맘껏 활동하면서 살아야지 난 지겨워 정말."
"그렇게 싫으면 다시 나오면 되잖아."
"처음엔 와서 보니깐 저 인간 혼자서 끙끙대는 걸 보니 불쌍해서 그냥 조금 도와주려 했던 건데 지금은 그냥 포기하고 붙어있는 거야. 어쩌냐. 내가 생각 안 해주면 누가 하리."
"잘 생각했어."
"그런데 선미 너 박 사장은 아예 안 만나는 거니?"
"응!.... 그 사람... 결혼했데."
"뭐? 언제?"
"이년 넘었다나 봐. 돌 지난 아이도 있어."
"아니 그럼 언제 했다는 거야? 너랑 헤어지고 바로 한 것은 아니겠지?"
"맞아."
"뭐라고? 그렇게 좋아 죽더니 어떻게 금새 결혼 할 수가..."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서 빨리 했데."
"야야!! 그건 핑계고. 하여튼 남자들이란...혹시.. 네가 헤어지자고 하니깐 홧김에 결혼 해 버린 건 아닐까?"
"설마 결혼인데..."
"설마가 아냐. 내가 아는 사람도 그런 사람 있었어."
"아닐지도 모르잖아."
"하긴 그래 너 하고는 인연이 아니라서 그렇게 됐지만 한번을 만나도 인연이 되려면 필이 꽂힌다 하잖아."
"필? 후 훗..."
"왜?"
"아! 우리 가게 김 군하고 미용 실 미스 리하고 오늘 결혼했는데 둘 다 처음 보는 순간 필이 통했데. 한 달만에 결혼 결정하고 오늘 결혼 한 거야."
"선미 너는 언제 필이 통하는 남자 만날까?"
"글세....."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는 탓인지 오후가 되자 날이 어둑해져 선미는 농장을 나왔다.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나온 연주는 서운한 표정이다.
"그이 돌아오면 놀다가 우리랑 같이 나가면 될텐데... 밥해줄 남편도 없는 것이 왜 그렇게 갈려고만 하냐?"
"김군이 신혼여행 가고 없어서 내일 새벽에 내가 물건 하러 가야 되."
퇴근 시간이 되어서 그런지 시내로 들어오자 차가 어찌나 밀리는지 한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다.
.....연주 말처럼 혹시...정말 홧김에 결혼 해버린 걸까? 아닐 테지....만약에 그렇다면....그래서 전번에 날 만나자고 했던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제 와서 어쩌라고...아냐 아닐 거야....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나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선미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선미는 꽃 도매시장을 나갔다. 차가 없어 꽃시장 나올 때마다 불편해하는 김군 때문도 그렇지만 차가 있긴 있어야 할 것 같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믿고 의지하던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교통사고로 마저 잃어버리고는 그 충격으로 자신은 절대로 차를 사지 않으리라 했었는데......
꽃 도매상가는 벌써부터 사람들이 붐볐다. 선미는 필요한 꽃을 사고 꽃꽂이용 화분을 사러 갔다. 두 손으로 들기에는 너무 양이 많아 택시 타는 곳까지 배달을 시키고는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자가용을 끌고 나와서인지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은 선미뿐이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서 빨리 가서 가게를 열어야 하는데 택시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때 와인 색의 승용차가 그녀 앞에 서더니 젊은 여자가 내렸다.
...차가 있으면 단가? 하필 내 앞에다 세우는 건 뭐야?....
차에서 내린 여자는 선미에게로 다가 왔다.
"저...차가 없으신가 봐요."
"네! 그런데 왜 그러세요?"
"제 차에 실으세요. 여기는 거의가 자가용이나 화물차가 많아서인지 택시가 잘 오지 않을 거예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야 고맙지만...."
그렇잖아도 시간이 많이 지나 마음이 조급했는데 다행이다 싶다. 운전을 하는 여자의 뒷모습이 조금 야위어 보인다고 느꼈다.
"고마워요. 그렇잖아도 오랜만에 나와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늦었는데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저 때문에 볼 일 못 보는 거 아닌가요?"
"아니 예요. 집으로 가는 길인데요 뭐. 제가 꽃을 좋아 하다보니 많이 사러 나오는 편인데 아침 일찍 여기로 오면 싸거든요."
그러고 보니 조수석에는 몇 가지 꽃다발 뭉치가 있었다.
"네 그러세요. 꽃꽂이 잘 하시나 봐요?"
"아뇨 그냥 꽂는 수준 이예요. 꽃꽂이를 배웠으면 하는데 마음뿐이지 실천을 못하고 있어요. 그쪽은 꽃가게 하세요?"
"네!"
가게 앞에 도착하고 문을 열자 여자는 깜짝 놀랐다.
"어머나 이렇게 크게 하세요? 아니 꽃꽂이도 하시나 보네요? 너무 예쁘다. 이거 직접 하신 거예요?"
"아뇨. 제가 한 것도 있고 수강생들 솜씨도 있어요."
"어머! 꽃꽂이 수강도 하세요?"
"네!"
"그럼 선생님이네요? 어쩐지 아까 그냥 지나치려는데 이상하게 선생님 보니까 끌리더라 고요. 선생님 저도 여기서 꽃꽂이 배우면 안될까요?"
"안되기는요. 저야 좋죠. 대 환영 이예요. 그런데 주부 세요?"
"네? 주부는 안되나요?"
"아 아뇨. 그냥...나이가 얼마 안 되 보여서 물어 봤어요."
"아이도 한 명 있는데 친정엄마가 잘 봐 주시거든요. 이번 기회에 배워야겠네 요."
-계속-
'♣ [문학] 자전적 소설 > ◈연재소설-2.가을빛 연가(종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연재;가을빛 연가<42>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0) | 2005.12.31 |
---|---|
[스크랩] 연재;가을빛 연가<40> 우영이의 남편 (0) | 2005.12.29 |
[스크랩] 연재;가을빛 연가<38> 욕심많은 남자 (0) | 2005.12.28 |
[스크랩] 연재;가을빛 연가<37> 갑자기 걸려온 전화 (0) | 2005.12.28 |
[스크랩] 연재;가을빛 연가<36> 잃어버린 자리 (0) | 2005.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