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청혼
정말 다음날 그 남자가 왔다.
임 과장은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났다며 혼자 온 것이다. 떠나면서 미안하다는 말 꼭 전해 달라고 하더란 다. 전과 다름없이 말은 많이 하진 않았지만 윤정이
에게는 달랐다.
"내 이름은 한형서 요."
"한형서? 잘못하면 한 형사로 들리겠네
요."
술도 많이 먹지 않고 늘 맥주 두 병정도만 마시고 손님이
많아 거들떠보지 않아도 탓하지 않고 삼십여분 앉아있다 가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 도장을 찍는다. 출장을 간다든지 사정이 있어서 저녁에 오지
못하게 되는 날이면 낮에라도 미리 와서 얼굴 한번보고 눈인사만 하고 는 가버린다.
"윤 마담아! 저 남자 혹시 너 좋아하는 거 아니냐? 맨 날 네
얼굴만 보고 가는 걸 보면."
"에그! 언니는 얘 좋아하는 남자가 어디 한 둘 이유? 야! 봐라!
너 혹시라도 꼬임에 빠져들지 마라. 이런데 와서 사랑타령 하는 자식들 치고 똑 바른 정신 박힌 인간들 없다. 그거 좀 어째해 보려고 작전 피우는
거란 말야 이 맹추야."
"얘! 나는 뭐 바보인줄 아니? 걱정 붙들어 매셔. 장사 한 두 번
해보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벌써 한 달여 동안 찾아오면서 형제들과 고향 얘기
살아온 과정 등 시시콜콜 안 해도 될 것들을 얘기 할 때는 황당한 기분도 들기는 했었다.
<만약에 정말 나를 좋아한다면 어쩌겠다는 거지? 아냐 나는 뭐 이런데 있다고 꿈도 없는 줄 아나? 저 남자는 절대 아니다. 키도 좀 더 커야되고. 어깨는 딱 벌어져서 내가 쏙 들어가도록 안길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가진 남자가 좋아. 아니지 나는 결혼 같은 건 안 할거야. 어느 집안에서 가정형편도 직업도 이런 여자를 받아들일까? 차라리 나중에 엄마 모시고 그냥 살 테야.>
그런데 모두 걱정했던 일이 생겨버렸다. 다른 날과 달리 한형서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웬 일인가 싶어 정 아랑 언니는 윤정이 눈치만 살핀다.
"왜 그래?"
"아니 아냐 어서 들어 가봐라."
"오늘은 어쩐 일 이예요? 방엔 잘 안
들어오시더니..."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소."
"뭐죠?"
"우선 우리 술 한잔 씩
합시다."
한형서는 연거푸 술을 입에다 들어부었다. 윤정 이도 두 어
잔 받아 마시며 무슨 얘긴지 궁금했다.
"천천히 드시면서 말씀하시죠."
"손 좀 내밀어 봐요."
"손은 왜요?"
"걱정 말고 손 내봐요."
한번도 손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니
당황 스럽기도 했지만 하긴 다른 손님들과는 손잡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니 이상 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참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다. 손 바닥에 금반지 한 개를 올려놓고는 꼭 쥐어주며 남자는
말했다.
"나와 결혼합시다. 내일부터 여기 그만두고 집에
들어가요."
"네? 지금 나랑 결혼하자고 했나 요?
농담이죠?"
"내가 왜 이런 걸 농담하겠소.
진심이요."
"그만 가 주세요. 지난번에는 여관에 오라고 놀리더니 오늘은
결혼하자고요? 나하고? 설사 농담이 아니라도 그렇지 나는 술 팔고 웃음 파는 여자예요. 제 정신 이냐
구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소. 난 아무나 한 테 말하는 것이 아니오.
술집여자 한 테 말하는 것도 아니오 오직 내 앞에 있는 내가 보고있는 당신에게 말하는 거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죠? 내 부모 내 형제 내 집 그리고 나!
내가 누군지 내 이름은 무언지 아나요? 아무 것도 모르면서 결혼하자고요? 역시 당신도 속물이야."
"이봐요. 그러지 말아요. 난 지금 진실이요. 다른 건 천천히 알아도
되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이면 되는 거요.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럼 천천히 생각 해보소."
"생각이고 뭐고 필요 없어요. 결혼 따위는 꿈도 꾸지
말아요."
윤정 이는 반지를 한형서 앞에 던지듯이 놓고는 나가
버린다.
문밖에서 엿듣던 언니와 정 아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간다.
윤정 이는 주방에 들어가 냉수를 벌컥거리며 들이마시지만 가슴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뭔가는 쉽게 식지를 않는다. 농담이겠지, 장난이야, 하면서도 그 남자의 눈은 진실처럼 보였기에 가슴이 뛴다.
"한형서 그 남자 정말 너 좋아하나 봐 야! 목소리가 애절한 게
진심인 거 같애"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그런데 너 지금 이 소리는 니 가슴 뛰는 소리 아닌가? 야 그 남자
말 보 터지니까 대단 하누만! 아이그! 나한테 는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결혼하자는 골빈 사내 어디 없나?"
"그럼 네가 가서 결혼하자고 해보지
그래."
다음 날도 또 그 다음날도 한형서는 줄기차게 반지를 가져와 대답해 달라고 한다. 반지는 결혼약속을 하는 의미로 주는 거라나. 끼워 보기도 전에 다 달아 빠지게 생겼다. 곰곰이 생각다 못한 윤정 이는 모든 걸 털어놓고 포기하도록 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이유를
말할게요."
그녀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자신의 신상을
처음으로 한형서 에게 꺼냈다.
"난 한형서 씨처럼 부모와 형제들 밑에서 자라지 못했어요. 가난을
빙자해서 내 부모는 나를 돈 몇 푼에 남에게 줘 버렸는데 양부모는 나를 집 한 채에 팔아 넘기려 했었어요. 그래도 나를 키워주신 분이고 아이를
낳지 못해 홀로 계신 엄마를 내가 모시고 살아야 해요. 그리고 난 다방에서 일했고 호스테스로도 있다가 이곳에까지 왔어요. 그래서 난 이미
사랑이니 결혼이니 이런 것 따위는 부질없는 환상일 따름 이예요. 어느 집안에서 나 같은 여자를 며느리도 받아들일
까요?"
"나도 대충은 알고 있소. 그런 것들이 대수요? 내가 당신 사랑하고
당신은 나만 믿으면 되요. 과거는 이미 지나 간 것이요. 지금과 미래가 중요 한 거 아닌가? "
"웃기지 말아요. 처음엔 사랑으로 한동안 은 버틸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면 과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혼하게 되는 사례를 많이 보고 들었어요. 언제까지나 과거를 가슴에 묻고 살수는 없는
거예요. 나중에라도 부모님이 모든 걸 알게 되면 어떨까요? 자식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그런 며느리를 영원히 용서 할 수 없을 거예요. 지금 까지
살아왔던 길도 평탄치 않았는데 더 이상 난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내 발로 걸어 들어가기 싫어요. 사랑?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요?"
"당신 이름 알고 있소. 이 윤정
맞잖소?"
"아니 어떻게... "
"과거에 메 달려 자신의 길을 막지 말아요. 어쨌건 난 당신과 결혼
하고싶소. 아무 생각 말고 나를 믿고 따라 주시오."
"아직도 모르시는군 요. 결정적으로 난 한형서 씨 좋아하지 않아요.
좋아하지도 사랑 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결혼을 하나요?"
"그건 걱정 말아요. 앞으로 날 좋아하게 될
거요."
"꿈 깨시죠. 그런 일 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난 눈도 없는 줄
알아요? 당신 같이 말라깽이에다 못 생긴 사람은 싫어요."
"나 운동하기 때문에 군살이 하나도 없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요.
태권도 유도 검도 유단자요. 벗으면 근육밖에 없소. 안 믿으면 벗어 보일까? 그리고 내 얼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살만 조금 붙으면
말이오. 당신이 예뻐서 그 덕에 나도 더 잘생겨 보일텐데 걱정 할 거 없소."
한형서가 나가고 윤정 이는 정 아를
불렀다.
"너 솔직히 고백해."
"뭐 뭘?"
"한형서 한 테 네가 얘기했지?"
"아냐...내가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그 남자가 그러디? 내가
말했다고."
"나를 아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말없이 매섭게 째려보는 눈초리에 정 아는 그만 실토를 해
버렸다.
"저 전 번에 너 방에 손님하고 있을 떼 그랬어. 나는 절대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어찌나 애절한 눈빛으로 애원을 하든지 그만 마음이 약해져 서리.....미안해.."
"얼마 받았어?"
"왜? 그 얘기도 하디? 아이고 그 남자 입도 싸구만. 야 남자가
입이 싸면 아무 짝에 못쓴다. 때려치워라."
"때려치우긴 뭘. 너도 그 남자랑 똑 같은 인간이야. 김치 국 마시는
거."
"치! 저 잘되라고 했는데 이게
뭐야."
정 아는 입이 댓 발로 튀어나와 뾰루퉁 해서는 다음날 해가 저물어
가도록 말을 않는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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