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배은망덕한 년과 망 할 할망구
가끔 전화를 할 때마다 엄마는 언제 올 건지 몹시 기다리는 것 같아 돈도 얼만 큼 모아졌고 해서 오늘은 집에 가기로 했다.
<설마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린 자식을 두들겨 패지는 않겠지?>
그렇게 맞고 살았다는 말은 아무 에게도 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는 모른다. 다만 정 아는 윤정이 엄마가 돈 때문에 그녀를 닥달하는 것으로 만 알고 있다.
아직은 남아있는 겨울 바람이 차갑게 느껴지지만 마음은 봄바람이 불어온다. 몇 년만에 돌아오는 집인가. 하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것이 엄마의 잔소리들을 일이 걱정이다. 뭐라고 할까? 대문 안 마당이 깨끗한 것이 예나 지금이나 엄마의 깔끔한 성격은 변함이 없나보다.
"엄마! 저...왔어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곧바로 문이 열리며 어느새
주름이 늘어버린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왔냐? 들어와라."
냉 냉한 목소리는 여전하시다. 돌아앉아 눈물을 훔치는 엄마의 굽은
등이 더욱 작게 보여 가슴이 뭉클해 온다.
이 여인이 그리도 자존심 굽힐 줄 모르고 큰소리 뻥뻥 치며 살던 그 여인이던가. 화가 풀릴 때까지 회초리로 때려 재끼던 그 여인이 지금 눈물을 흘리는 이 여인인가?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은 변한다고 하더니 그 드세던 기세는 어디로 간 걸까?
윤정이 얼굴에서도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린다.
"독한 년! 너는 어쩜 그렇게도 독하냐?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지도 않던?"
"전화했잖아요. 나도 마음 편하지는 않았어요. 돈을 벌어야 하겠기에
올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동안 생활비는 어떻게....아버지 오시나요?"
"아버지는 아예 오지도 않고, 너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엄마
고향에서 질녀들이 취직하러 와서 지금 나하고 같이 살면서 공장에 다니고 있지."
"잘 됐네 요. 엄마!
미안해요."
"그런데 서울엔 가니까 좋더냐? 널 키운 사람은 나야 그들은 널
낳았을 뿐이다. 넌 나하고 살아야 해! 근데 날 배신하고 서울로 찾아가다니! 왜 양육비 달라고 하니까 가라고 하던? 나쁜
인간들!"
"아니예요. 그 분들도 엄마한테 잘 하라고 했어요. 난 동생들이 보고
싶어서 갔을 뿐 이라고요. 동생들이 있는 줄 뻔히 알면서 그냥 있을 수 없었어요. 혼자 크면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세요? 다른 애들이
형제랑 친척들 얘기하면 나는 입다물고 있어야 했어요. 이제 엄마도 날 이해 해 줘야 해요. 지금까지는 엄마 하는 데로 다 들어 줬잖아요. 나
동생들보고 싶으면 또 서울 갈 거예요."
다시는 서울에 가지 않으리라고 했지만 엄마의 말에 반항이라도 하듯 자신도 모르게 서울에 또 가리라는 말을 한 것이다. 더 이상 얘기를 하고 있으면 화가나 험한 말이 튀어나올 거 같아 일어나려 했다.
"그래 가라. 나쁜 년! 실컷 키워 놨더니..."
"이젠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지겹지도 않아요? 난 엄마 배신 한
게 아니 예요. 이제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요. 나도 엄마 모시고 살려고 생각하고 있다고요."
윤정 이는 백에서 돈이 들은 봉투를 꺼내 엄마 앞에
놓았다.
"뭐냐?"
엄마는 돈 봉투를 집어들고는 안을 들여다보더니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아니 몇 년을 집나가서 벌은 게
이거냐?"
"엄마 나 집 나갈 때 빈 손 이었어요. 그 나마도 아끼고 아껴서
모은 돈 이예요. 나도 밥은 먹어야 돈을 벌 게 아닌가요? 그거 적은 돈 아니잖아요. 또 갔다 드릴 테니 그냥
쓰세요."
"너! 집은 전셋집이냐? 집에서 출근하면
될걸"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전세 돈 빼오라는
말이다.
"아니 예요. 그만 가야겠어요."
"자고 가지?"
"장사해야 되요."
"무슨 장사하는데?"
그녀는 엄마 얼굴을 한 참 들여다보았다. 술장사한다면
뭐라고 하실 까?
"나 술장사해요."
"그래? 그거 잘하면 돈 많이 버는데...그럼 장사하다가 돈 많은
사람 있으면 잡아서 결혼하면 되겠네."
놀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됐다는 표정이다. 엄마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결혼도 안한 딸자식이 술장사한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수? 집
나가서 그 동안 뭘 하고 살았는지 궁금하지도 않냐고요."
"네가 이젠 머리통 커졌다고 말 막 하는구나? 배은망덕한
년!"
"갈게 요."
윤정 이는 얼른 백을 집어들고는 집을 나와 버렸다. 뒤에서 엄마가 언제 올 거냐고 묻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대답도 하지 않고 뛰어나온 것이다.
목구멍에 뭔가가 끼어 있는 것같이 아프다.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앞을 가린다.
그때 집 나갈 때도 이랬었지. 어디 가서 실컷 울고 싶어진다. 사실은 집에 올 때는 하룻밤 엄마랑 자고 갈려고 마음먹고 왔었는데 더 있어봐야 서로 마음만 다칠 것 같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어도 자꾸만 눈물이 흐른다. 이미 각오는 했다지만 왜 이렇게 서운한지 엄마가 원망스럽고 이런 자신이 너무 불쌍해진다.
<망할 할망구! 좋아 지려다가도 밉단 말야. 한마디만이라도 고맙다고. 어디서 뭘 하고 살았느냐고 물어만 봤어도 이렇게 내 자신이 비참하지는 않을텐데...>
거리로 뛰어나와 걸었다.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
"눈물 좀 닦아요."
문득 그녀의 얼굴 앞에 손수건을 들이대는 사람의 목소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한형서가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얼떨결에 그 손수건을 받아들고는 얼굴을
닦았다.
"여기는 웬 일이세요?"
"출장 갔다 오느라 며칠 못 봐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얼굴이라도
보려고 갔는데 금방 집에 간다고 나갔다고 하더군. 버스가 막 출발을 해버려 택시로 뒤따라 왔소."
"이젠 미행까지 하세요? 기분
나쁘게."
"집이라도 알고 싶었는데 잘됐지 뭐요. 바로 가려다가 금방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한번 들어 가볼까 하던 중이었는데 윤정씨가 나오더군요. 그런데 엄마랑 싸웠소? 당신도 울 줄
아는구려."
"알 필요 없어요. 댁이 뭔데 우리 집에 들어와요? 그리고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아요. 손수건 고마웠어요. 가 보세요."
"당신 기분은 알겠는데 너무 그렇게 도도하게 굴지 말아요. 이런 것도
다 인연이 있어서 우리가 만난 건데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나를 믿고 따라주면 안되겠소?"
"싫어요. 제발 그만 해요. 난 한형서 씨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당신은 그저 우리 집 손님일 따름이라고요."
"끝까지 이러면 나 오늘 차에 뛰어들어 죽어 버릴 거요. 그러면
신문에 커다랗게 기사가 나겠지? '한형서가 이 윤정이란 여자를 좋아하다 거절당해서 자살했음'이라고"
"마음대로 하시죠. 자살을 하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내가 이 윤정 이라는 거 아무도 모르니까 그런 기사는 안 날걸요? '한형서 란 남자가 못생긴 자신을 비관해서 자살했음'이라고 나면
몰라도."
그러다 둘은 동시에 배를 잡고
웃었다.
"윤정씨! 그렇게 웃어요. 너무
예쁘오."
"............"
둘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팠지만 한형서가 옆에 있어 꾹 참았다.
<젠장! 가라고 해도 안가고 어쩌자는 거야. 그 회사는 일 안 해도 월급 주나봐. 배고파 죽겠는데. 아이고 다리 아파라. 이 인간은 눈치도 없냐?>
"혹시 회사 그만 뒀어요?"
"아니오. 출장 갔다와서 이틀 휴가요. 배고픈데 우리 밥 먹으러
갑시다."
같이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배가 너무 고파 어쩔 수없이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귀찜을 시켰다. 한번도 먹어 보지 않은 음식이었지만 매콤한 것이 괜찮았다.
한형서는 밥을 두 그릇이나 비우고는 찜도 어쩜 그렇게도 맛있게 먹어대는지 입가에 양념이 발갛게 묻었는데도 개의치 않고 먹는다.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먹었다.
남자는 콩나물을 그녀의 밥에 듬뿍 얹어주었다.
"그렇게 먹지 말고 음식은 맛있게 체면 차리지 말고 먹어야 복이
들어와요."
그녀의 입가에도 양념이 발갛게 묻었다. 그는 휴지로 그녀의 입을
닦아준다.
"당신의 이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소?"
<정말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진심일까? 진심이라면 난 어떻게 해야되지? 내가 어떻게 감히 이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야?>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는 그의 눈을
피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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