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자전적 소설/◈연재소설-1.날고싶은 새(종결)

연재;날고싶은 새<9> 또 다른 운명

보라비치 2005. 10. 13. 11:34

9. 또 다른 운명 

 

 동네 들판 가운데에 거북이 등처럼 생긴 동산이 있고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조그만 무덤 앞에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다. 상석 위에다 소나무 잔가지들을 한아름 꺾어놓고 하나는 밥이고 하나는 고기반찬 하나는 또 뭐하지? 라며 조잘댄다. 그 아이들 중에 낯익은 얼굴이 있다. 윤정 이는 살그머니 다가서서 그 아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바로 그녀남동생상언 이었다.


"상언 아!"


동생을 불렀지만 그 아이는 그녀를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한 발짝 더 다가가 불러보았지만 역시 놀기에만 정신이 팔렸다. 윤정 이는 동생의 팔을 잡으려고 했더니 갑자기 울어대며 도망을 가는 게 아닌가.


"상언 아! 어디가! 집에 가야지. 빨리 와!"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져 사방이 보이지 않는다. 동생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보이지 않고 울면서 목이 터져 라고 불러도 대답조차 없다. 순간 발 밑이

허전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는 깊고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                *               *                 *                     *


 
"아이고 정신이 드나보네. 아가씨! 아가씨 눈 좀 떠봐요."


누군가 흔드는 것 같아 애써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쉽게 뜨여지지 않았다. 그녀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들이 들렸다.

 

<죽어서 지옥에라도 온 건가?>

 

"아직 나이도 얼마 되지도 안은 것 같은데 무슨 일이래?"


"쬐그만 가시나가 벌써 연애질 하다가 머시마 한 테 차였는 갑지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꿀물이나 좀더 타와라."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분명 지옥은 아닌 것 같고 그럼 죽지는 않았나 보다. 다시 또 이 악몽 같은 세상을 눈을 뜨고 봐야 되는 건가? 차라리 이대로 눈을 감고 뜨지 말아야지...>

 

"정신은 차린 것 같은데 눈을 못 뜨네. 야! 김 군아 차가운 수건 좀 갖고 와 바라."


"하! 그 가시나 때문에 내만 귀찮아 죽겠네."


차가운 수건이 얼굴을 덮었다. 그 때문에라도 더 이상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윤정 이는 눈을 살며시 떠 주위를 살폈다.

 

약간은 빛 바랜 푸른색의 벽지가 발라져있는 걸 보니 방안 인 것 같다. 몇 사람이 주위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고 인상이 부드러운 여자와, 입술만 새빨갛게 그렸어도 전혀 천해 보이지 않고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는 여자.

그들 옆에 뾰족한 턱에 듬성듬성 수염이 나있고 이마는 넓어 보이는 총각이 앉아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다 그녀가 눈을 뜨는 걸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 쉬었다.


"고개 들고 이 꿀물 좀 마셔봐."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더 이상 넘길 수가 없었다. 나이들은 여자가 약봉지를 들고 오더니 한 첩을 꺼내 윤정이 에게 먹으라고 한다.


"괜찮아요."


"괜찮기는, 몇 시간째 피 같은 걸 얼마나 토했는데. 이 약은 술 먹고 속 아플 때 먹는 거니까 우선 먹고 날새면 아침에 요 앞에 병원에 가보자."


"그런데 여기는 어디예요? 제가 어떻게 여기 누워 있나요?"


"기억 안 나는가 보네. 여기는 다방이고 이층인데 오늘은 조금 늦게 열 한시쯤에 김 군이 문을 열려고 내려가서 셔터를 올렸는데 입구에 술 취해 쓰러져 있었다면서 들쳐 안고 올라 왔드라. 김 군은 우리 주방장인데 김 군이 안 봤으면 아가씨는 죽었는 거라. 아침부터 무슨 술을 그리 많이 마셨냐?"


"고맙습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아가씨 말씨가 부산 사람이 아닌 거 같네. 서울에서 왔나?"


"얌마! 서울에서 부산에 애인 만나러 왔다가 실연 당했제! 그래서 술 마신 거 아니가 맞제? 그라고 와그래 무겁노 가시나야."


"김군 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까불지 말고 청소나 퍼뜩하고 자자."


 빨간 입술의 여자가 무뚝뚝한 말투로 김 군을 데리고 방을 나간다. 형광등 불빛이 훤한걸 보니 밤인가 보다. 시계를 보니 한시가 훨씬 넘어가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술은 왜 그렇게 많이 마셨니? 보니깐 술도 마실 줄 모르는 거 같구만. 저 김군 말마따나 실연 당했나?"


"그건 아니 예요. 그냥 죽고 싶어서...."


 목구멍이 콱 조여 오는 것 같더니 이내 눈물이 솟아 나온다.


"아니 나이도 아직 얼마 되지 않은 거 같은데 무슨 사연으로...그라고 죽는 게 쉬운 줄 아나. 세상사는 거 보다 어려운 것이 바로 죽는 거라. 근데 지금 힘드니까 천천히 얘기하고 집에는 전화 안 해도 되나? 엄마 안 기다리나. 힘들면 내가 전화 해 주께. 내일 아침에 병원에 갔다가 몸 좀 추스려 갖고 집에 가야지."


"집에는 안 들어 갈 거예요."


놀랐는지 무슨 말인 가 하려다말고 울기만 하는 그녀의 손을 토닥거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다시 속이 울렁거리며 토할 것 같다. 뱃속 저 아래 깊은 곳이 쓰리고 아파 온다. 빈속에 마신 술 때문인가 아니면 다시 세상에 뛰어들 생각에 두려움 때문일까.


"김 군아! 문 잘 잠그고 니는 오늘 미안 하지만 홀 소파에서 자야겠다. 이모한테 내는 여기서 잔다고 말해라."


"가시나 콱!!"


 청소를 다 하고 들어오던 김 군은 윤정이 에게 눈을 한번 흘기고는 나갔다.


"김군 저 애가 말을 좀 거칠게 해서 그렇지 참 착한 애다. 오해하지 말어. 내가 데리고 있은 지도 삼 년이 넘었네. 나이는 스물 다섯 살인데 일도 잘하고.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참 착해."

 

 이모란 빨간 입술여자를 말하는데 나이 많은 여자의 친동생이다.

대학졸업 하고 직장 생활도 했었는데 파혼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마흔 한 살이 되도록 결혼도 안하고 언니를 도와 이 다방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다.

다행히 지금 혼담이 오가는 중이란다. 언니라는 여자는 쉰 세 살이고 역시 혼자 산다. 다른 곳에 집이 있지만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가끔씩 들리고는 주로 다방에서 기거를 한단다.

 

서서히 약 기운이 온 몸에 퍼지는지 자꾸만 땅 속으로 빠져드는 것같이 힘이 없어지더니 깊이 잠들어 버렸다.
 
 음악소리에 놀라 눈을 뜨니 어제 일이 꿈처럼 머리 속을 맴돈다. 옷걸이에 남자 옷만 걸려있고 주방 안에 방이 있는 걸 보니 이 방은 주방장 김 군이 쓰는 방 인가보다.

 

 홀 안에서는 음악이 좀더 크게 들린다. 제법 넓어 보이는 홀에서 김 군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윤정 이는 현기증 때문에 눈앞이 흐려져 잠깐 눈을 감았다.


"그냥 누워 있제. 속은 좀 어떠니? 요 아래 식당에다 죽 좀 쑤어서 갔다달라고 했으니까 오면 먹고 병원 가보자. 그리고 있는 동안에 내보고는 큰언니라 하고 내 동생한텐 작은언니라고 불러라. 얼른 샤워하고 뮤직박스 안에 방이 있으니까 이제는 우리랑 같이 쓰자."


 벌써 화장을 하고 푸른색 투피스를 입은 큰언니가 나왔다. 어젯밤 화장을 지웠을 때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괜찮아요."


"야! 괜찮으모 여기 와서 청소해라. 남의 방에서 잤으모 방 값을 해야 안되나."


"죄송합니다. 뭘 하면 되죠?"


그녀는 다리가 후들거려 쓰러질 거 같아 얼른 소파를 잡았다.


"가시나 순진하기는 농담도 몬하나."

 

 병원은 길 건너 바로 앞에 있었다. 입고있던 옷은 토하면서 모두 버려서 작은언니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비슷한 사이즈라 몸에 맞기는 한데 약간 무릎위로 짧게 올라간 치마길이가 영 어색하다.

 

 빈속에 독한 술을 단번에 많이 마셨기 때문에 위장이 헐어서 며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뱃속이 쓰리고 따가워 물만 마셔도 울렁거리지만 큰언니 보기 미안해서 억지로 국물만 몇 모금 마셨다.
 
 이삼일 지나고 나니 배 아픈 것도 없어지고 죽도 한 공기씩 먹었다. 조금씩 기운을 차리면서 홀 안 청소는 그녀 담당이 되었다. 바닥 쓸고 열 아홉 개나 되는 테이블을 다 닦고 나면 김 군이 밀대로 바닥을 닦아낸다.

 

홀 중앙에 경계선처럼 놓인 기다랗고 큰 수족관에는 금붕어와 잉어들이 먹이를 먹으며 자유롭게 헤엄을 치고 있다. 갑자기 엄마얼굴이 수족관유리에 어른거린다.

 

<지금쯤 엄마는 무얼 하며 어떻게 하고 계실까? 윤정 이를 찾으러 온 동네를 뒤지고 다닐까? 밥은 잡수실까? 선보는 날은 어떻게 됐을까? 엄마가 많이 실망 하셨겠다. 집 한 채가 날아가 버렸으니...집에 들어갈까? 아냐. 차라리 잘 됐어. 맨 날 돈벌어 오라고 하면서 취직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데 이런 곳이면 어때. 조금 다른 길이긴 하지만 우선 돈을 벌어야 하니 이곳에서 당분간 지내보는 거야.>

 

"뭐해? 이리 잠깐 와서 앉아봐."


 한약냄새가 나는 따끈한 쌍화차 몇 잔이 테이블에 놓여있고 큰언니, 작은언니, 김군, 레지아가씨인 손 양  모두 앉아 그녀가 앉기를 기다렸다. 차 내음이 향긋하게 느껴진다.


"미스리라고 부를게. 집에는 안가겠다니 그럼 우리랑 같이 있어볼 생각이야?"


"그래도 괜찮으시다 면 그러고 싶어요."

 

"자신 있어? 이런 곳은 처음 일 테고. 말들어보니 고생도 안 해보고 공주처럼 큰 거 같은데. 힘들어도 이겨낼 자신 있느냐 그 말이야."


"조금은 두렵지만 열심히 해보겠어요."


"이햐! 가시나 간 크네. 니 내가 안 무섭나."


"또 쓸데없는 소리. 그러면 작은언니가 요새 연애한다고 자주 자리를 비우니까 그럴 때는 카운터 좀 보고 저녁때는 뮤직 박스 책임져라. DJ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손양 니는 미스 리하고 동갑이니까 친구처럼 잘 지내면서 모르는 거 갈켜 주면서 잘지내야해 알았지?"


"네! 그건 자신 있어요."

 

 학교 졸업 후 엄마 몰래 가끔 찾아다니던 음악 감상 실에서 석 달 동안 사장님 권유로 뮤직박스 DJ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좋아하던 터라 해보고 싶기도 해서 단번에 허락을 했었다. 꽤 인기도 좋았는데...


 그것도 잠시! 극성스런 엄마가 핸드백을 닦다가 안에든 음악실 메모쪽지를 보고 추궁하는 바람에 DJ 는 석 달만에 끝나 버린 것이다.

 

"힘드는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하고 우리 이제 한 가족이니까 열심히 해보자. 옷은 당분간 작은언니 안 입는 거 많으니까 월급 받으면 새로 맞추던지 사든지 그렇게 해"


 카운터에서 주문 체크 방법이랑 계산방법을 작은언니가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경험은 없지만 배우기는 쉬웠다. 두어 시간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곁에서 가르쳐 주더니 조금은 서툴지만 척척해내는 걸보고는 '제법 잘하네' 그러면서 나가 버렸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길을, 앞으로 어떤 운명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는 이 길을 그녀는 걸어가고 있다. 새로운 운명을 찾아서.....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