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자전적 소설/◈연재소설-1.날고싶은 새(종결)

연재;날고싶은 새<26>목석같은 아내와 강간하는 남편

보라비치 2005. 10. 29. 08:53

26. 목석같은 아내와 강간하는 남편

 

 방바닥엔 벽에 부딪혀 부서진 전화기 잔해가 흩어져있다. 울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마음과 달리 눈물이 쏟아진다. 뺨이 부어 올라 화끈거린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결혼은 왜 했는지 후회스럽다.

 

남자를 믿었던 자신이 바보였다. 아니 더 이상 엄마와 다투기도 싫었고 돈 벌어야 된다는 강박간염 속에 술장사를 계속 하기도 싫어졌었다. 그리고 한형서 란 남자는 더없이 자상하고 따뜻했었지. 그렇다면 남편을 변하게 만든 건 자신이란 말인가. 말도 안돼. 아침에 아이들 유치원에 보내놓고 부서진 전화기를 들고 전화가게로 갔다.


"아따 전화기가 와 이래 됐능교. 아저씨가 던져삣는가베요."


"어떻게 아세요?"


"하루에 이런 게 몇 개씩 들어 온다입니꺼. 부부 싸움 할 때 테레비 냉장고는 비싸니까네 제일 싼 요 전화기를 던진다 하데예. 머리 잘 쓴 거 아닙니꺼. 근데 이 아저씨는 힘도 좋는가베예. 전화기가 바싹 뽀사지서 고치도 몬하겠네예 고마 새거 사이소."

 

 새 전화기를 사 들고 오는 자신이 우스워 윤정 이는 혼자 피식 웃는다. 흔히 하는 말로 처음에 길을 잘 들여야 된다고 했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일까. 이제 화만 나면 아니 조금만 말대꾸를 하는 날이면 전화기를 발로 차던지 집어던져 박살을 내 버린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된다고? 엄마한테 하도 맞아서 지겨운데 이젠 남편이 손찌검을 하다니 역시 난 어디로 가나 나 일 수밖에 없는 건가?>

 

 잘못은 자신이 해 놓고도 아내가 잘못을 지적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아내가 미워서도 아니다. 그녀를 누구보다 더 사랑한다. 아내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하고 순순히 복종하며 말없이 아이들 잘 키우고 열심히 산다.

 

 그러면서도 늘 외로워 보이는 아내가 애처럽고 불쌍해 잘해 주고 싶어도 왠지 집에만 들어가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가면에 가리워 진 아내의 모습에 질려서 일까? 차라리 모자란 듯 여느 여자들처럼 질투라든지 앙탈도 부려보고 전처럼 애교도 부릴 줄 알면 좋을 텐데 아내는 결혼 후 과거의 이 윤정을 철저히 숨기려 하며 사는데 그러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마음이 아프다.

 

 자신 때문에 묶여버린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되돌릴 수가 있으리. 답답하다. 왜 나만이 아내를 이해해야 하나 힘들어하는 남편의 심정을 아내가 조금만 이해한다면 지금 같은 일들은 없을 텐데 말이다. 그런 것이 그를 밖으로 내 모는 꼴이 되어 버린지도 모른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다고 형서는 자신이 조금은 심하다는 걸 느꼈는지 요즘은 외박도 하지 않고 술은 마시지만 자정이 되기 무섭게 들어왔다. 그것이 며칠이나 갈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꼬박꼬박 들어오는 남편이 기특하다. 하지만 제 버릇 개 주냐?


열흘도 체 못 넘기고 다시 시작이었다. 믿지는 않았지만 며칠동안 밤마다 입에 발린 사랑고백과 함께 아내의 몸을 탐하던 남편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난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남편이 아침에 나가면서 하는 말에 윤정이는 할말을 잃었다.


"오늘 요 앞에 있는 병원에 가서 주사 맞아."


"주사라니..아프지도 않는데 무슨 주사요?"


"음, 그냥 그 병원에 가면 알아. 어제 나도 주사 맞고 얘기 해 놨으니까 가기만 하면 돼."


".......알았어요."

 윤정이는 대충 집안일 해 놓고 병원에 갔다.
도로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병원인데 아이들이 아플 때에도 가까워서 자주 가던 병원이다.


"안녕하세요."


병원을 들어서자 간호사가 반갑게 맞는다.


"저...남편이 여기 와서 주사 맞으라던데..."


"네, 오늘 아침에도 아저씨 다녀가셨어요."


"저....무슨 주사예요? 나는 아프지도 않은데 왜 맞아야 하죠?"


"아..저...항생제 주사예요."


"항생제 주사라뇨?"


"아저씨가 염증이 있으시기 때문에 어머니도 맞으셔야 해요. 감염이 됐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혹시...성병 말인가요?"


"...네!"

 

...아니 그럼...이 인간이 성병에 걸렸단 말야?...이걸 어째... 며칠동안 집에 잘 들어오더니 결국 이런 걸 나한테 옮기려고 그랬나?...이 인간을...미치겠네...

 

"항생제 주사라서 좀 많이 아파요."


정말 아팠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주사 맞은 엉덩이가 뻐근하다.
하루종일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더러운 이 몸둥아리를 내다 버릴 수도 없고
찜찜한 기분을 억누르며 저녁에 남편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술도 못 마실 테니 일찍 오겠지.....


 저녁이 되자 윤정이 생각대로 일찍 들어오는 남편. 얼마 만에 보는 말짱한 남편의 얼굴인지...


"당신 성병 걸렸어요?"


"에잇 더러운 년! 나는 싫다고 했는데...어떻게 그년하고 잤는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술이 너무 취해서 몰랐는데 깨보니깐 생전 처음 보는 년이 옆에 있드만...에잇! 재수가 없어서...."


"아무데서나 잠을 자니깐 그렇죠. 난 무슨 죄가 있어서 그 더러운 병에 걸려야 해요?"


"당신은 괜찮을 거야. 혹시나 해서 맞으라는 거지."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하여튼 난 바보야."


"두 어 번만 주사 맞으면 돼."


기가 차다. 미안하다고 말해도 시원찮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는 남편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밉고 원망스럽다.


 다시 그들의 사이는 찬물을 끼얹은 듯이 썰렁해지고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그러기를 한달 여가 지나고 윤정이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왔음을 알아챘다.


요즘 들어서 갑자기 입맛이 없어지더니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이 아닌가. 가끔 어지럽기도 하더니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별이 반짝거린다. 윤정이는 몸이 약하니깐 혹시 무슨 병이라도 난 건 아닐까도 생각하면서 문득 달력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두 달째 생리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첫 달은 모르고 지나갔는데 이번 달에도 일주일이나 지난 것이다.
놀란 가슴을 누르면서 꼼꼼히 날짜를 짚어보니 분명히 전 번에 항생제 주사 맞은 달부터 없었다.


....이거...혹시..임신이 아닐까?....


긴가 민가 하는 마음에 좀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생리는 하지 않고 구토증은 심해져 임신이 확실한 것 같았다.


"저...나..임신 한 거 같은데...."


"응? 그래? 확실한 거야? 병원에 가 봤어?"


어쩌다 일찍 들어온 남편에게 윤정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뇨. 병원에 가보려고요. 근데 같이 가야겠어요."


"왜?"


"아무래도 한동안 일찍 들어 왔을 때 임신이 된 것 같은데... 그때 이후에 항생주사도 맞았고....임신이면 태아한테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니깐 같이 가서 원장님과 의논 해봐야 하잖아요."


"혼자가면 안돼?"


"그런 건 혼자 결정 짖지 못해요. 당신 때문이니까 당신이 직접 의논해 보세요."


"............"

 

 다음날,
두 사람은 산부인과 병원 앞에 섰다. 이 병원에서 두 아이들을 낳았기 때문에 잘 아는 병원이다. 형서는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같을 것이다. 차라리 임신이 아니었으면...
 먼저 임신반응 검사를 하니 임신이 확실했고 남편은 원장 실로 들어갔다. 한참 후 남편이 원장 실에서 나왔다.


"뭐래요?"


"들어 가봐."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걸 보니 역시.... 윤정이는 원장 실로 들어갔다.


"아이고~~ 이게 얼마만이야? 이리 앉아요. 애들은 잘 크고?"


"네!"


"근데...이런 건 내가 결정 할 수 없는 거예요. 남편과 의논해서 결정을 해야해."


"그럼..."


"그래요. 임신초기에 항생제 주사를 맞았다니 태아에게 좋지 않아요. 기형아가 될 학률이 높지. 그렇다고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어. 에구~~ 몸도 이렇게 약해 가지고...암튼 둘이서 잘 해결해요."


"...네..."


아니었으면 기대를 걸었던 가슴에 횡 하니 찬바람이 들어온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


"그렇잖아도 구박덩어리인데 기형아 낳아서 키울 자신이 난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 낳으라고 하면 낳죠."


"아냐. 그냥 수술하기로 합시다."


세상에 법이 없다면....지금 이 순간 그를 죽여 버리고 싶다. 아니 법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죽일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하지만 아이들의 아빤데...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어쩌구....

 

차가운 수술대위에 누워 있으니 머릿속은 텅 비어 있는 느낌이다.


"그래요. 차라리 결정 잘했어. 이렇게 산모가 몸이 약해 가지고 임신까지 했으니 태아에게도 좋지 않아요. 앞으로 보약도 좀 먹고 나서 임신해도 늦지 않았으니까 마음 푹 놓고 한숨 자."


여자 원장이라 걱정해 주는 말이 엄마같이 따뜻한 느낌이다.


"하나, 둘... 숫자 세어 봐요."


"하나, 둘, 셋.....마흔 셋, 마흔...."


"어머나 아직도 잠이 안 와요? 다른 엄마들은 일곱까지 세면 금새 잠이 들던데...."


간호사가 놀란 표정으로 말하자 원장이 다시 마취제를 투여한다. 순간 머리 쪽에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더니 이내 맑아진다.


"하나, 둘, 셋....서른 여섯, 서른 일곱, 서른 여...."


"아직도 예요?"


"글쎄요...정신이 더 맑아지는 느낌 이예요."


"특이 체질이네."


"특이 체질 요?"


"심장이 약한 사람이나 신경이 아주 예민한 사람들이 간혹 마취가 안되거든. 한번 더 시도 해보고 안되면 그냥 수술해야겠네."


 한번 더 약을 투여했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고 원장님은 수술 준비를 했다.
윤정이는 처음 중절 수술을 해보는 것이라 두려움도 크지만 자신의 몸에 잉태된 아기의 소중한 생명을 한 인간의 잘못으로 무참히 짓밟아 버리다니 난 죄인이다.


....저 인간을 난 영원히 용서 할 수가 없다.....


아랫도리가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파 이를 악물고 있었지만 간간이 신음이 나왔다.


"조금만 참아요. 다 됐으니까...아기 낳을 때도 잘 참아 내더니 역시 장하네."


윤정이는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차라리 이대로 잠이 들어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다 됐으니까 조심해서 일어나 봐요."


간호사가 일으키는 데로 몸을 일으키니 어지러웠다. 회복실로 옮겨져 누웠는데 천장과 벽이 울렁거리기 시작하고 윤정이는 토하기 시작했다. 이제사 약 기운이 도는가 보다.
손과 발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한숨 자던지 회복이 되는대로 집에 가셔도 됩니다."


일이 다 끝났다고 그런지 간호사는 한마디 던지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눈물이 자꾸만 나온다.


"괜찮아 졌으면 차라리 집에 가서 편히 쉬는 게 났지 않을까?"


윤정이도 그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일어났다. 바닥이 눈앞으로 튀어 올라 왔다가 저만치 도망을 간다. 병원 밖으로 나왔는데 도저히 몸을 가눌 수가 없었지만 죄인이 이런 고통쯤이야. 남편이 택시를 잡을 동안 윤정이는 쪼그리고 앉아 토하기 시작한다.


"어서 타."


윤정이를 택시에 태우더니 남편은 타지 않았다.


"나는 일이 바빠서 가 봐야 하니깐 타고 가. 집 앞에 내리면 누나가 기다릴 거야."


대답도 하기 싫었다. 언제 자기 누나한테 전화를 했었나 보다. 눈은 자꾸만 감겨지고 정신도 흐려져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다.


"아지메. 많이 아프요?"


"..........."


"앗따 많이 아픈가비네. 이래 아픈 사람을 혼자 태우면 우짜노. 아지메 정신 차리소."


"걱정 마세요."


"아까 그 양반이 남편 맞소?"


"왜요?"


윤정이는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눈을 부릅떴다.


"왜가 뭐요? 이래 아픈 사람을 혼자 보내니까네 그라지요. 참말로 독한 사람이네. 아지메도 맘 고생 많컸소. 기분 나쁘겠지만도 딱 보모 아요."


"............."


"다 와 가니까네 정신 차리소 아지메."


택시 기사는 걱정이 되는지 자꾸만 뒤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연방'아지메'를 부른다.
정신이 가물가물 하면서도 아지메를 부르는 소리에 문득문득 정신을 차린다.


"아지메 다 왔는데요. 누가 나와 있을거라 카드만 어데 있능교. 정신차리고 좀 보소."


그때 누군가 택시 문을 열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형님. 오셨어요?"


형서 누나였다. 다리가 자꾸만 꼬여서 걷지를 못하자 형님은 윤정이를 안다시피 부축을 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그 놈이 제 정신이야? 이렇게 몸도 못 가누는 사람을 혼자 보내다니..."


"바쁘데요."


"아무리 바빠도 누구 땜에 이렇게 됐는데...집에까지 데리고 오지. 저녁에 들어오기만 해 봐라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근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아침에 전화가 와서 수술 할거라고 하길레 내 단숨에 달려 왔지. 그 놈이 병 걸려 와서 그렇다면서?"


"그런 말도 해요?"


"수술하는 이유를 물었지 내가 에구 몹쓸 놈 같으니.... 건 그렇고 자넨 그냥 마음 푹 놓고 아무 생각 말고 자. 그게 최고 좋은 약이야. 내가 미역국 끓여 줄게. 중절 수술하고 나면 아기 낳을 때보다 더 잘 먹어야 되는 거야."


윤정이는 주체할 수없이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베개로 얼굴을 짓 눌러본다.


"울고 싶을 때는 그냥 울어 버려 참으면 병이 돼."

 

 누군가 몸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깨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무 것도 먹지 않아서 미역국 먹으라고 깨웠어. 일어나서 좀 먹어. 응?"


"형님, 지금 몇 시예요?"


"지금 열 두 시 넘었어. 애들은 아까 다들 잠들었어."


"그 사람 들어 왔어요?"


"그 인간이 아직 안 들어오네. 내가 혼내줄려고 기다리는데...이놈 요새도 이렇게 늦게 들어오나?"


"............."


"언제 정신 차릴려나. 제 마누라 걱정도 안 되나? 하긴 저도 마음이 좋지 않으니까 어디서 술 퍼먹고 있나부지 뭐."


차라리 들어오지 않는 것이 나으리라. 얼굴을 보면 분노가 더 클 것 같다.
형서는 새벽 여섯 시가 넘어가니 어슬렁 들어 왔다.
형님의 큰 소리에 윤정이는 화들짝 놀라 잠이 깼다. 어제 병원에서 돌아 온 이후부터 줄 창 잠을 잤다. 마취제를 세 번이나 투여를 했더니 뒤늦게 약효가 나는 모양이다.


"야 이 놈아. 네가 사람이냐? 네 마누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죽었으면 초상 치려고 들어 왔니? 사람이 초죽음이 되었는데 혼자 차 태워 보내는 인간이 어딨어."


"그래서 택시 태워 보냈잖아요."


"하여튼 너는 벌받을 거야."


형서는 누워있는 윤정이 얼굴을 힐긋 쳐다보고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가 버렸다.

 

             *                   *                     *                    *


 
 다행히도 사업은 잘되어 사업장도 넓은 데로 옮기고 집도 아파트로 입주를 했다. 그렇잖아도 몸이 약한 윤정 이는 이사하느라 무리를 해서인지 온 몸이 너무 아파 누워 버렸다. 집안 일과 아이들 때문에 파출부를 불렀다. 병원에서는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여러 가지 합병증이 생겼으니 일단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고 조금 회복이 된 후에 다시 검사를 해야겠다고 한다.

 

 남편은 바깥일이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으니 병원이나 열심히 다니란다. 날이 갈수록 술과 외박은 변함이 없다. 어쩌다 얘기를 꺼내면 큰 소리로 말문을 막아 버리던지 손찌검을 했다. 아이들이 놀라서 울면 아이들도 때렸다.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참고 넘어 가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누님한테 가서 돈 좀 빌려오지."


"당신 누님인데 당신이 얘기 해보지 그래요?"


"지난번에 한번 가져 왔는데 또 내가 어떻게. 당신이 얘기하면 거절을 못해서 줄지도 모르잖아. 안되면 동생한테도 가보고. 사무실 문닫게 생겼어. 오늘 당장 갔다와. 응?"

 

 사업장을 자꾸 넓히다보니 여기저기서 돈을 제법 끌어 썼나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사업이 잘 된다 해도 그렇지 하루 저녁 술값 접대비가 어떤 날은 몇 백 만원이 나갈 때도 있는데 백 만원씩 만해도 보름이면 얼마인가? 운영비 인건비 세금 생활비 등 나가는 돈이 얼마나 많은데....

 

"돈 벌 때 정신 차리고 절약하지 맨 날 술독에 빠져 사니 밑 빠진 독 물 붙기 아닌가? 발등에 불 떨어지니까 이제 날더러 돈 빌려 오라고요?"


"이 여자가 지금 누구 약올리는 거야?"

 

 오후 버스로 전주행 버스를 탔다. 아이들은 파출부에게 집에서 하룻밤 자라고 했다.
형서 누님은 윤정 이를 보자마자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어대며 넌더리  를 쳤다.


"내가 올케 올지 알았지. 며칠 전에 전화 받았었어.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전 번에 빌려간 돈도 안 갚고 또 돈을 달라니 맡겨 놨나? 아유 못살아. 뻑 하면 돈 빌려 달래고. 틀림없이 동생한테도 가보라고 했을 텐데 거긴 더 어려워요. 함부로 가지 말고 내려가서 무조건 없다 하더라고 해. 이그 올케가 무슨 고생이야. 돈 벌어서 어렵게 사는 동생들 도와주지는 못하고...에그그 애물단지."

 

 윤정 이는 말도 꺼내 보지 못했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아 선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놀란 누님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들어가 누워 있으니 죽을 끓여서 가져 오셨다.


"그놈이 몸도 좋지 않은 자네를 보낼 때는 똥줄이 탄 거여 시방. 옛날 총각 때도 월급타면 가시내들 달고 다니면서 펑펑 써대고 모자라면 나한테 오곤 했는데 부모님 돌아가실 때도 그 애 때문에 눈을 못 감고 돌아 가셨다니 께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  인자 결혼해서 정신 차리나 했더니. 올케가 고생이 많네 그랴."

 

 아침 첫차로 내려왔는데도 아홉 시가 넘었다. 단 얼마라도 돈을 가져 왔으면 좋으련만 빈손으로 가서 실망하는 남편얼굴을 어떻게 보나 걱정하면서 사무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남편이 깜짝 놀라 일어나고 그 옆에 웬 여자가 앉아 있었다.


"벌써 오는 거야? 일찍 왔네. 돈은 가져 왔어?"


"아뇨. 지난번에 빌려간 돈이나 갚으래요. 그런데 이 분은 누구세요?"


 물어 볼 필요가 뭐 있겠는가. 아침 일찍부터 같이 있는 걸 보면 밤에 같이 지내고 같이 나왔겠지? 이제 아침밥도 같이 먹으려다 나한테 들킨 거겠지 이런 눈치라면 척 하면 삼척이다.


"응? 아 인사하지. 이쪽은 나한테 돈도 빌려주고 사업상 도움을 많이 주시는 분이요."


"그래요? 안녕하세요? 그런데 돈 받으러 오셨나본데 아무리 받을 돈이 있다해도 그렇지 사업장에 여자 분이 아침부터 찾아오나요? 그만한 에티켓은 아실 거 같은데요..."


 순간 여자의 얼굴이 빨게 지면서 당황하는 눈치다. 나이도 형서와 비슷하겠고 얼굴은 잠을 설쳤는지 부석부석 했다.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참느라 애써 웃으며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파렴치한 같으니라고 급하다고 돈 빌려오라고 마누라를 누님한테 보내놓고 지는 딴 여자랑 놀아나다니 용서 못해>


벼룩 이도 낯짝이 있다더니 그날 저녁에 왼 일로 일찍 들어왔다. 저녁밥을 먹으면서도 내내 윤정이 눈치만 실실 본다.


"이혼 해줘요. 더 이상 이렇게는 살고싶지 않아요."


"그럼 아이들은 어쩔 건데?"


" 당신은 다시 결혼 할 테니 당연히 내가 키워야 죠."


"안돼!"


"안되다니 요? 내 아이 내가 키운다는데, 당신은 아이 키울 자격 없어요. 아빠노릇도 제대로 못하면서 안된 다니 말도 안돼."


"고아원에 데려다 주는 한이 있어도 너는 안 줘."


"이제 보니 당신은 아직 철이 안 들었어요. 나는 몸이 아픈데도 참고 진주까지 갔다가 빈손으로 오면서 얼마나 걱정을 했었는데 남편이란 사람은 딴 여자랑 밤새 같이 지낸 것도 부족해 아침부터 재수 없게 사무실에 데려오고 그러니 사업이 잘될 리가 있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창피한 줄 알아야지 그것도 못생긴 여자를 말이야."


"이게 말이면 다 인줄 알아? 이혼? 이 똑똑한 여자야. 너를 병신을 만들어놓고 먹여 살리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이혼은 안 해. 말끝마다 이혼해달라는데 좋아하는 놈이라도 있나 부지? 옛 애인이라도 찾았냐?"


"할말없으니까 괜히 억지 부리지 말아요. 다른 여자 데리고 놀면서 이혼 안 해주는 심보는 뭐예요?"


"너를 사랑 하니까."

 

 형서는 윤정 이를 번쩍 들어 안고 침대로 가서는 반항 할 틈도 없이 옷을 벗겼다. 이를 악물고 버티어보지만 어림없이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손이 남편의 손이 아닌 괴물 손같이 차갑고 징그럽게 느껴지고 거칠게 숨을 몰아 쉬는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져 보이는 것이 소름이 끼친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그 더러운 손 좀 치워요."


"가만히 있어."


 입 속으로 들어올려는 남편의 혀가 뱀 혀 바닥처럼 차가워 이를 악물고 눈을 꼭 감아 버렸다. 그의 딱딱해진 페니스가 그녀의 몸을 사정없이 뚫고 들어온다. 이미 경직되어버린 그녀의 몸둥이를 부여잡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윤정 이의 머리 속에서는 남편과 어떤 여자가 정사를 나누는 광경이 떠오른다.

 

<어젯밤에도 그 짓을 했을 테지? 그 더러운 것이 지금 내 안에 들어오다니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이를 악문 체 비명을 질러댄다. 형서는 아내의 비명에 더욱 흥분해 절정에 도달한다.

 이건 강간이다. 아무리 부부라도 아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강제로 덮치다니 강간이야. 돌아누워 잠든 남편의 모습이 왠지 낯설어 보인다. 죽이고 싶도록 밉고 원망스럽다.

 

 윤정 이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 기를  틀어놓고 한참을 서있다. 몸 안에 들어온 더러운 것들이 물에 말끔히 씻어내려 가도록 문지르고 또 문지르고...
문득 거울 속에 세상 다 살은 것 같은 몰골로 서 있는 바보 같은 여자가 보인다.

 

<네가 이 윤정이냐? 왜 이렇게 바보처럼 살아? 이럴 줄 모르고 결혼했니? 했으면 잘 살아야지. 부모에게 버림받고 이제 남편한테도 버림받니? 왜 살아?>

 

윤정 이는 밖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차가운 바람이 얇은 옷 속을 비집고 들어와 싸늘하지만 숨을 크게 들이쉬니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해진다. 멀리 보이는 빌딩들은 제각기 네온사인이 번뜩이고 아파트 창문마다 환한 불빛이 새어나온다.

 

<저들은 다 행복할까? 나처럼 혼자 울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까?>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주차장에는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세워져있고 남편의 하얀 차도 보인다.

 

<여기서 뛰어 내리면 아플까? 아냐 순식간이라 모를 거야. 금방 죽을까? >


눈물 때문에 불빛은 흐려지고 바람은 더욱 세게 불었다.


<이 바람이 저 먼 곳으로 나를 날려보내 주었으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곳으로>

 

난간 쪽으로 바짝 다가서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순간 아이들 울음소리가 귓전에 맴돌아 그녀는 정신이 번쩍 났다.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졸지에 엄마 잃은 아이들을 누가 돌봐주지? 나처럼 다른 엄마 손에 키울 수는 없지. 내 꼴을 만들 수 없어 내가 지켜 줘야 되.>

 

단숨에 옥상을 내려와 아이들 방에 들어 가보니 둘 다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든 남편의 모습조차도 보기 싫어 거실에 나와 소파에 기대어 누웠지만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건강이 좋지 않아 요즘엔 술을 잘 마시지 않았지만 오늘밤에는 마시고 싶다.

 

 

                                                -다음편에 계속-